프롤로그

by소여

이 바카라에 등장하는 아이의 이름과 일부 개인정보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변경하거나 생략했습니다. 의료적 경험과 발달 과정은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으며, 개인의 경험이 모든 아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약 2년이 지나도 아이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배란일을 맞춰보기도 하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매달 반복되는 희망과 실망 속에서 우리 부부의 일상은 조금씩 지쳐갔다.

시간은 흘러 결혼한 지 약 3년째가 되던 해 추운 겨울날, 마침내 기적처럼 아기는 우리에게 찾아왔다.

임신테스트기를 확인했을 때, 선명한 두 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남편과 나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로를 마주 봤다.

"정말 우리에게 온 게 맞을까.”

내 떨리는 한마디에, 남편은 초음파 사진을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신중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우리는 산부인과에 가서 초음파를 통해 아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아이의 심장 소리, 그 규칙적인 소리는 나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이로운 울림이었다.

그리고 초음파 속 아기는 아직 너무나도 작아서 마치 아몬드 한 알처럼 보였다.

그렇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 부부는 비로소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부터 나는 매번 산부인과 검진일만 기다려졌다.

며칠 사이에 아이는 얼마나 컸을까, 나중에 아이를 만나면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이 아이는 남자아이일까 여자 아이일까, 그런 사소하지만 설레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남편은 아이의 태명을 ‘토리’라고 지었다.

그 의미는, 남편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역사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아이가 아빠를 닮으면 좋겠다며 벌써부터 엄청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딸이 좋아? 아니면 아들이 좋아?라고 질문했고, 남편은 딸이던 아들이던 다 좋지만 그래도 딸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대답했다.

시간은 흘러, 성별을 알 수 있는 주수가 되었다.

초음파 너머로 순조롭게 잘 크고 있던 우리 아이를 보며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아이는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선생님은 내 질문에 초음파를 유심히 보시더니, 다리 사이에 ‘로켓’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로켓’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아들이라는 거예요?라고 순진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피식 웃으시며 “네 아들이에요.”라고 대답해주셨다.

나는 아이의 성별을 듣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토리가 아들이래~”라고 말했다.

남편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래 아들이면 나중에 같이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면 좋겠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아들을 마주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기 용품들을 하나둘 채워 나갔다.

처음 우리 집에 들인 것은 아기욕조였다.

그리고 아기 옷과 초점바카라, 손싸개와 모자 등 작고 귀여운 물건들을 하나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자라면서 점차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면 신이 났는지 배를 툭툭 차며 응답하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새 식구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행복한 일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축복 같던 일상은 금세 깨어지고 말았다.

자궁경부무력증으로 고위험 산모가 된 나는 장기 입원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가 정상 주수를 채워 태어날 10월까지 버텨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다.

입원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아이가 예정보다 일찍 세상에 나오게 될까 봐 끊임없는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입원 3주 차에 접어든 7월의 마지막 날 새벽, 난생처음 겪는 날카로운 통증이 아랫배를 쥐어짜듯 파고들었다.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궁수축 검사를 시작했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불규칙한 수치는 마치 불길한 전조처럼 내 심장을 조여왔다.

담당 간호사는 내게 진통이 걸린 것 같으니 분만실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아직 아이는 28주밖에 안 됐는데, 이대로 세상에 나오면 아이가 생존할 수 있을까, 그 두려움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자연분만이 어려워져 제왕절개를 선택해야만 했고, 서늘한 조명 아래 차가운 수술대에 오르며 공포 속에서 아이의 무사함을 간절히 기도했다.

2024년 7월 31일, 오후 6시 18분. 아이는 우렁찬 울음 대신 가냘픈 “응애” 소리를 내며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수술 후 하루가 지난 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우리 아들이 있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작은 몸집의 아이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계 장치와 모니터의 깜빡임 속에 갇힌 아이는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와 ‘토리’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