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둔 다정한 본심
밤의 뾰족한 가시와 단단한 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내면 만날 수 있는 여리고 달콤한 본심. 고소한 밤, 볶은 양파, 순수한 두유가 어우러져 완성되는 이 밤 수프는 지친 몸과 마음을 다정하게 감싸 안는 마법 같은 한 그릇입니다
기력이 바닥나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날이 있습니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걷는 일이 유난히 버겁게 느껴져, 웅크리고만 싶은 날. 밖에서 잔뜩 세우고 있던 날 선 긴장감을 벗어두고,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 냄비를 꺼냅니다. 나를 위한 작고 따뜻한 위로, 밤수프를 끓이기 위해서입니다.
도마 위에 밤을 올려두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세상과 거리를 두려는 듯 뾰족한 가시를 곤두세우고, 그 안에는 다시 단단한 껍질로 자신을 겹겹이 방어하고 있지요. 상처받지 않으려 잔뜩 힘을 준 모습이, 어쩌면 타인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으며 방어벽을 쳤던 나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묵묵히 그 거친 껍질을 깎아내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희고 여린 속살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냅니다. 세상의 풍파에 맞서 뾰족하게 날을 세우는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도 사실은 저렇게 무르고 다정한 본심이 숨어있는 것처럼요.
단단했던 밤은 따뜻한 물속에서 뭉근히 끓어오르며 서서히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풉니다. 푹 익어 부드러워진 밤 위로 달큼하게 볶은 양파와 고소한 두유를 부어 천천히 끓여냅니다.
냄비 속에서 하얗게 끓어오르는 수프를 둥글게 둥글게 젓습니다. 억세고 뾰족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과정에 화려한 기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닥이 눋지 않게, 천천히 저어주며 시간을 들여 저어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냄비 속에서 끓어오르는 수프를 젓고 있다 보면, 어느새 묵직한 구수함이 주방에 퍼집니다, 그 느릿하고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저를 둘러싸고 있던 뾰족한 가시들도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밤 수프를 그릇에 담아 한 숟가락 먹어봅니다. 자극 없이 부드럽게 밀려와 거칠어진 입맛을 감싸주는 편안한 맛이 텅 빈 속을 따뜻하게 채워줍니다.
오늘 하루도 참 애썼다고, 이제 그만 가시를 거두고 고소하고 둥글게 살아가도 좋다고 가만히 토닥여주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