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

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by아리엘
서비스 스틸컷 _ 우진이가 퇴원하면 하고 싶은 것 중 하나




53. 사각지대




"지금부터는 그냥 내 생각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돼."


나는 어딘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동창회 때 김기태는 아직 교도소에 있었어. 애들이 기사 가지고 떠들었던 게 기억나거든. 근데 그때 민유정은 이미 정진영이 그 시민이란 걸 알고 있었을 거야. 맞지? 네가 관여된 일인데 민유정이 몰랐을 리가 없어. 그럼 딱히 새로운 소식도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의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민유정은 진영이가 김기태를 잡은 시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동창회 전까지는 그 사건이 내 담당이었다는 건 몰랐다.


그래도 나는 그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원래도 민유정은 너를 자기가 아끼는 물건 정도로 여기곤 했잖아. 나는 평소에도 그게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 통제광에다가 소유욕도 있고. 성격 진짜 이상했다고, 걔."


정의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대놓고 깎아내리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를 본 만큼 나름 객관적인 시선이었다.


누가 봐도 알 만큼 민유정은 내게 집착하고 있었던 거다. 그동안 나만 계속 모른 척했을 뿐...


정의는 그날을 되짚는 듯 잠시 허공을 보았다.


"근데 걔가 그날, 그 기사 얘기가 돌고 나서 갑자기 기분이 확 안 좋아졌어. 특히 너 가고 나서는 더했지? 넌 그냥 가 버렸지, 걔는 계속 저기압이지... 그래서 나는 그냥 니네가 싸웠구나 하고 짐작만 했어. 그런데 아무래도 그날 알게 된 게 아닐까? 니가 정진영이랑 다시 만난다는 거."


나는 가게 뒤편에서 나를 몰아세우던 민유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쏘아붙이던 목소리까지 생생했다.


'너 요즘 만난다는 거 정진영이야!?'


혹시 내가 그때 민유정에게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 결심한 거지. '정진영을 강우진 옆에서 치워야겠다.' 걔라면 그러고도 남잖아. 어떻게 하면 치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김기태를 이용하기로 한 거지."


정의의 말이 한마디씩 쌓일 때마다 가슴속이 점점 무거워졌다.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니었어.'


유정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정의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민유정은 그전부터 김기태를 만나러 교도소에 자주 갔을 거야. 오늘 새벽에 걔 뛰어온 걸 보면... FWB라는 건 어디까지나 윤진이 말일 뿐이고, 아까 본 민유정은 누가 봐도 김기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거든. 단순히 잠자리만 나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어. 내 생각은 그래."


나는 효범이의 말을 떠올렸다. 김기태가 복역 중일 때 민유정이 '여러 번' 면회를 간 기록이 있다고 했다. 민유정의 말대로라면 11월에 딱 두 번 간 것처럼 들렸지만, 효범이가 고작 두 번을 두고 '여러 번'이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김기태가 출소했고, 자신이 계획한 대로 그가 진영이를 노렸는데... 일이 잘 안 풀린 거지. 그것만으로도 짜증 나는데..."


정의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나를 보았다.


"너희 집에 갔다가 진영이를 본 거야. 너 때문에 자기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던 건데, 니가 걔를 지키고 있네? 눈이 뒤집혔겠지?"


현관 앞에서 진영이를 보고 굳어 버리던 민유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걔답지 않게 앞뒤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움직이다가, 너희 집까지 알려 주게 된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드네."


정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는 대답 대신 시선을 떨궜다. 이불 위에 올려놓은 손끝이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본 정의는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이게 네 탓이라는 말은 아니야."


"알아, 나도."


그는 잠시 나를 보다가 말을 돌렸다.


"근데 김기태는 왜 갑자기 자살하려고 했을까. 나는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되네. 걔가 그럴 놈은 아니잖아."


정의는 새벽에 수술실에서 본 것을 다시 떠올리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내가 직접 봐서 알아. 망설인 흔적이 하나도 없었어. 보통은 몇 번 주저한 흔적이 보이거나, 찔러도 얕게 찌르는 데서 그치는데, 걘 한 번에 찔렀더라고. 심지어 찌른 채로 두지 않고 뽑기까지 했고. 자기가 자기 자신한테 그러는 게 쉽지 않은 거거든?"


"그건 그렇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쇼한 게 아니야. 진짜 죽으려고 한 거지. 실제로 사용한 도구가 조금만 더 날카로웠거나, 실려 온 시간이 조금만 늦었어도 걘 죽었어."


나는 어젯밤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깨어나면 조사하겠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둘러댔지만, 정의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진짜 죽을 작정이었으면,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거잖아. 이거 혹시 뭔가 민유정이랑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정의와 어디까지 공유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원래 깊은 얘기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혼자 저만큼이나 알아냈으니 이제 와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사실... 민유정, 며칠 전에 참고인 조사받았어. 김기태 건으로."


"뭐? 왜?"


"조사하다 보니 의심되는 정황이 있었나 보지..."


정의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물었다.


"그게 언젠데?"


"김기태 송치되기 이틀 전."


정의는 그제야 무언가 납득이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혼잣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 그런 말을... 그럼 김기태는 자기 목숨을 걸 만큼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거네."


"그런 말? 무슨 말?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아니, 김기태 말이야. 새벽에 수술 들어갈 때, 니가 나한테 꼭 살려야 한다고 소리쳤을 때."


"응."


"걔 그때 출혈성 쇼크로 혈압이 70까지 떨어져서, 멘탈도 거의 드라우지였거든. 아, 그게 반쯤 정신 나간 상태였단 소리야. 아무튼 움직일 힘도 없었을 텐데, 내 팔을 붙잡더라고.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했어."


나는 정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소리?"


"자기 살리지 말라고, 그냥 죽게 두라고. 목을 다쳐서 소리도 잘 안 나오는데 쉰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더라? 난 그래서 자기가 죽이려던 니가 자기를 살리라고 하니까, 새삼 죄바카라감 같은 걸 느끼나 보다 했거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새끼한테 죄바카라감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근데 아무래도, 뭔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지?"


나는 대답하는 대신 이를 갈았다.


"아무튼 그래서, 어쩔 거야?"


정의가 물었다.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경찰인 이상, 알게 된 모든 것들을 팀장님께 보고하고, 절차대로 그녀를 정식으로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갑갑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엄마라고 부르던 사람... 그 사람에게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어."


내가 고개를 숙이고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자, 정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일단 쉬어. 환자 붙잡고 내가 괜한 소리를 너무 많이 했네."


그는 나를 눕히고, 수액이 잘 들어가는지 한 번 들여다보며 속도를 조절했다. 그러고는 내 옆에 앉아 바카라을 꺼내 들었다. 조용한 병실에 바카라장 넘기는 소리만 사락사락 울렸다. 나는 멍해지는 눈을 깜박거리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영이와 정의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맞지? 자. 여기, 너도 많이 피곤해 보여."


"당직 끝나고 바로 왔어. 이제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잠만 잘 거야."


나는 정신이 바로 들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너도 정말 피곤한 삶이구나. 그나저나 우리 오랜만에 만난 건데, 상황이 이래서 대화도 제대로 못 했네."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또 만나면 되지. 나 좀 있으면 입대해, 오히려 그때 되면 시간이 더 날걸."


"그래? 군의관으로 가는 건가?"


"응, 처음에 훈련만 끝나고 나면 출퇴근하니까. 저녁에도 주말에도 지금보다 자유롭대. 그럴 때 또 만나면 되지."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사이좋게 마주 보고 웃는 둘을 향해 입을 떼었다.


"...굳이? 진영이가? 너를?"


"깼어?"


진영이는 내 쪽으로 다가와 일어나려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그런 진영이 허리를 보란 듯이 감싸 안았다. 유치한 건 알지만, 또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정의는 내가 봐도 멋진 놈이라 늘 불안하다.


"나도 커피 마시고 싶다."


내가 응석 부리듯 그녀의 허리에 고개를 파묻자, 그녀는 생각났다는 듯 몸을 살짝 옆으로 빼고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짠!"


나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나와, 그녀가 들고 있는 작은 쇼핑 봉투를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도넛 가게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피...!"


"너, 달달한 거 먹고 싶다고 했잖아. 생각나서 사 왔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정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먹여도 되나요? 의사 선생님?"


나도 고개를 돌려 정의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진영이 곁으로 다가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음. 그럼 이걸로, 딱 한 개만."


그는 내가 먹을 수 있을 만한 도넛을 하나 골라 주었다. 부드러운 글레이즈드 도넛이었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고, 그녀는 내가 먹을 수 있게 티슈에 싸서 내게 넘겨주었다.


도넛을 받아 드는 나를 보며 정의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짜 딱 한 개만 먹어. 당이랑 기름이 많아서 여러 개는 안 돼."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 들었다. 그런 정의를 본 진영이가 내게서 떨어져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가려구?"


"빨리 가서 자야지. 이러다 윤진이한테 차일 것 같긴 한데. 살려면 자야 돼..."


그의 장난스러운 푸념을 들은 진영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커피 잘 마실게. 우린 또 만나자."


"응. 조심해서 가!"


정의는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나 간다. 무리하지 마라. 또 올게."


"그래, 푹 자라."


진영이는 정의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를 보더니 빵 터졌다.


"입에 다 묻었어! 애기야?"


그녀는 내게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훑었다.


"맛있어?"


"응."


"무사히 퇴원하면 더 달달한 것도 잔뜩 먹게 해 줄게."


그녀는 내게 바짝 붙어 내 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체취가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자, 익숙한 바디워시 냄새가 풍겼다. 이사할 때 내 걸 챙겼거나, 내 것과 같은 걸 산 모양이었다. 그녀에게서 나와 같은 냄새가 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상처가 잘 아물면..."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이때 그녀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겠지만,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달궈야 했다.



.

.

.




그날 저녁에는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중 하나는 팀장님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어, 강우진이. 몸은 좀 어뗘, 괜찮은겨? 뭐해 지금? 바뻐?"


"네, 팀장님.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녁 식사 중이었습니다."


"어, 그려. 잘 먹어야 나으니께. 잘 챙겨 먹어야 혀. 자고로 한국 사람은 뭐든 다 밥심이라고."


"예."


"저, 쓰읍... 그게... 거시기, 다름이 아니고..."


팀장님은 평소와 달리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니께... 그게 말여. 나는 뭐 딱히~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여."


"예?"


"그래도 뭐 이게 또, 꼭~ 나쁘지만은 또 않을 것 같기도 해서 말여."


"무슨 말씀이신지..."


팀장님은 주어 없이 한참을 에둘렀다.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오늘 서로 공문이 하나 왔는데 말여."


"공문이요?"


"어. 저 뭐여, 유명한 방송국 양반들인 거 같더라고?"


"예?"


"아니, 너랑 그 뭐여 그 용감한 처자랑... 둘이 투샷을 좀 내보내면 어떻겠는가...허는...뭐."


나는 팀장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래요?"


"알지, 나도 알지! 내가 더 잘~ 알지 인마! 근데 워떠켜. 위에서는 좋다는디."


"예!?"


나는 하마터면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나를 보고 있던 진영이도 놀랐는지 입 모양으로 '왜?'라고 물었다.


"아니, 홍보실에서 말여. 요새 경찰 이미지가 어쩌고, 친근한 형사가 어쩌고 해싸면서 신들이 났어. 어쩌다 보니 서장님도 아셔가지고... 알지? 그 냥반이 또 매스컴을 음~청 좋아햐. 이이."


할 말이 없었다. 진영이는 어느새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내가 인마 알아보니께 너, 이미 얼굴이 다 까발라졌더만~? 중학교 사진도 막 올라오고 잉. 뭐 이왕 엎어진 거 콩고물이라도 줏어먹자는 심정인 거지~"


"아, 팀장님...!"


"니가 정~ 싫다면 뭐 하는 수 없지만서도... 나는 그렇다? 니가 참, 어찌 됐든 얼굴도 팔렸는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용감한 처자랑 알콩~달콩 데이트도 맘껏 하고 뭐, 어? 다 그게 뭐 너 좋자고 하는 말 아녀!"


팀장님은 말도 안 되는 말로 나를 유혹했지만, 사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약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긴 했다.


"암튼, 뭐... 급한 건 아니니께. 천천히 생각을 한번 해 보라는겨."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자마자 진영이가 내 팔을 붙잡았다.


"박 PD지? 박 PD가 그런 거지?!"


"아마도?"


"와, 그 능구렁이 같은 양반! 나를 건너뛰고 너한테 갈 거라고 내가 예상은 했지만...! 너를 건너뛰고 온라인 게임으로 다이렉트로 갈 줄이야...!"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화가 난 건지, 감탄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래서? 할 거야?"


그녀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정색했다.


"안 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진짜? 홍보실에서 좋아한다며. 너 이거 잘만 하면 꽤 괜찮다? 여차하면 경찰 관두고 인플루언서로만 살아도 돼. 우리 우진인 얼굴도 잘생겼잖아~"


"안 한다고."


"나랑 같이 나오는데? 미모의 여친을 가진, 강 친근 형사님? 어때?"


그녀가 턱을 괴고 눈을 반짝였다. 나는 대답 대신 남은 죽을 한 숟갈 크게 떠 넣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한참을 깔깔 웃었다.


사실 그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아주 관심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 따위는 없었다. 그런 것보다도, '그런 방송을 하고 나면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내 속도 모르고 나를 놀리는 데 푹 빠진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그날을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날 밤 받은 또 다른 한 통의 전화는 잠시나마 붕 떠 있던 기분을 다시금 가라앉혔다.



.

.

.



퇴원은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담당 교수로부터 아직은 절대 안정해야 하니 무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나는 지금 민유정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날 밤 받았던 전화 때문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민유정의 어머니가 달려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집에는 혼자 계셨던 듯했다.


"우진아...! 몸은 좀 괜찮은 거니? 엄마가 가 보지도 못하고, 미안해!"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민유정은 내게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은 그날 아침, 경찰서를 방문해 자수를 한 모양이었다.


효범이 말로는 자신이 진영이의 커리어를 질투해 괴롭히기 위해 김기태를 시켜 진영이를 스토킹하게 했고, 우리 집 주소도 본인이 알려 줬으며, 김기태는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나를 찌른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민유정이 자진 출두한 당일, 당연히 집으로 연락이 갔고... 어머니는 그날에야 내가 다쳤다는 사실도, 그게 민유정의 탓이라는 것도 모두 알게 된 듯했다.


그러고는 그날 내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며 오열하셨다. 당장이라도 병원으로 오겠다는 걸 말리며, 퇴원하고 찾아뵙기로 했다. 그리고 그게 오늘이었다.


며칠 사이 몇 년은 늙어 버린 듯한 모습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며칠째 잠도 못 잔 것 같은 퀭한 얼굴을 보니 걱정부터 앞섰다.


"전 괜찮아요. 엄만 괜찮아요? 일단 좀 앉으세요."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익숙하게 냉장고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내밀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이니..."


결국 그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흐느끼는 그녀의 등만 토닥였다.


"그런데 우진아,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 유정이가... 정말 그랬을까?"


그녀는 내가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가 만나 볼게요..."


"그래 줄래? 네가 가서 한번 얘기 좀 해볼래?"


그녀는 절박하다는 듯 내 손을 붙잡았다. 사건의 피해자인 내가 현재 유치장에 있는 민유정을 만나는 건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머니를 이대로 모른 체하기가 어려웠다.


"우진아, 엄마가 진짜 너무 미안해. 너도 피해자고, 너한테 이런 부탁하면 안 된다는 거 나도 아는데... 엄마가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진아, 엄마가 애 갈아입을 옷 좀 챙겨 줄 테니 네가 좀 가져다줄래?"


"네, 그럴게요."


그녀는 딸의 짐을 챙기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 잠시 비틀거렸다. 나는 급히 일어나서 쓰러질 뻔한 그녀를 붙잡았다.


"제가 할게요. 잠깐 앉아 계세요."


그녀는 머리를 짚으며 미끄러지듯 소파에 앉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대신해 민유정의 방 문을 열었다.


민유정의 방은 내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화장품과 촬영 장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옷을 챙기기 위해 민유정의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화려한 옷들과 가방이 가득 차 있었다. 안쪽에 있는 서랍 가장 위 칸을 열자 그 안에는 속옷이 들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한집 식구처럼 지낸 탓인지, 별다른 거리낌 없이 몇 개를 챙겨 쇼핑백에 담았다. 그리고 다음 칸을 열어 갈아입을 티셔츠와 바지, 양말도 몇 개 챙겨 담았다.


더 챙길 게 없나 싶어 방을 둘러보다가, 바카라상 위 코르크 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늘 같은 곳에 있던 보드였는데,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던 것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앞에 가서 섰다.


그곳에는 사진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여행지에서 찍은 셀카,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등... 그러다 오래된 수학여행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나도 있었다.


나는 그 사진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밝게 웃고 있는 유정이와, 편안한 듯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다시 한번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크게 내쉬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슴은 여전히 답답했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이 방에 계속 있다간 또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았다. 하지만 방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았다가 열지 못하고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방금 뭔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나는 다시 발을 옮겨 코르크 보드 앞에 섰다. 그리고 수학여행 사진 옆에 있는 사진 하나를 보드에서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그건 어느 촬영 현장의 사진이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조명 스탠드 앞에서 민유정이 활짝 웃고 있었고, 그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중 사원증을 목에 건 여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얼굴보다 조금 더 단정해 보였지만, 분명 맞았다.


그녀는 2년 전, 망원동 모녀 살인사건의 피해자 신소희였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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