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깜박거렸다. 바로 정신이 차려지지 않아 한동안 멍했다.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그러다 어젯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쓰러졌던 게 떠올랐다. 날이 밝은 걸 보니 내가 기절을 했던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깼어?"
누가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했던 나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진영이가 앉아 있었다. 울었는지 그녀의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다.
"진영아..."
"새벽에 병원에서 급하게 전화가 왔어. 네가 복도에서 쓰러졌다고."
그녀가 보호자로 등록이 되어 있어 연락이 간 모양이었다. 푹 자라고 집에 보내 놓고 다시 이렇게 달려오게 만들다니...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를 붙잡은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나는 손을 돌려 그녀의 손을 제대로 맞잡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리고, 내 수술을 집도했던 담당 교수가 들어왔다.
"아, 깨셨나 보네요. 강우진 형사님. 몸은 좀 어떠세요?"
그는 나를 들여다보며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었다.
"네, 괜찮습니다."
"네에. 괜찮은 사람은 쓰러지지 않지요?"
그는 차트를 넘기며 가볍게 혀를 찼다. 그의 말에 진영이가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내 환자복을 열고 붕대를 들춰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수술 부위가 덧나진 않았네요. 넘어지시면서 가볍게 머리를 부딪히신 것 같은데, 검사상으로 큰 이상은 없어요."
진영이는 담당 교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쓰러진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담당 교수는 차트를 탁 소리가 나게 닫았다.
"쓰러지실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듣기로는 갑자기 호흡을 어려워하다가 쓰러졌다고 하던데... 정확한 건 상담을 받아 보셔야겠지만, 아무래도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만 들었을 때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공황 상태 혹은 과호흡 증상으로 보입니다."
그의 말에 나보다 진영이가 먼저 반응했다.
"공황장애라는 거예요?"
"발작이 한 번 있었다고, 공황장애라고 판단할 순 없어요. 갑작스러운 스트레스에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는 '증상'을 공황이라고 하는데, 그 증상이 예고 없이 반복되고 계속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면 그때 다들 아시는 그 '공황장애'라는 진단이 붙는 겁니다. 다만 더 정확한 건 정신과를 연결해 드릴 테니 진단을 받아 보시는 것을 추천드리고요. 정확한 원인은 지금으로서는 제가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진영이 질문에 대답한 그는 이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강우진 형사님, 무리하시면 안 돼요. 본인은 젊어서 괜찮을 것 같죠? 이래서 젊은 남성분들이 더 위험한 거예요. 자기 몸 상태에 대해 너무 자신하거든요. 지금 개복 수술하신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런 몸으로 밤새 한숨도 안 주무시고, 몇 시간이나 복도 의자에 앉아 계셨다면서요?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날도 추운데 그러다 정말 큰일 납니다. 당분간은 무조건 안정, 또 안정하세요. 아셨죠? 병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자제하시고요."
"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지금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담당 교수보다 옆에서 나를 보고 있는 진영이가 더 무서웠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만 삼켰다.
담당 교수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진영이가 내게 질문을 쏟아냈다.
"복도에 계속 앉아 있었어? 왜? 그리고 숨을 못 쉬다니?!"
나는 한꺼번에 밀려드는 질문에 무엇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더니 진정하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안정해야 한다니까, 더 안 물어볼게. 네가 말하고 싶어지면 그때 얘기해."
그녀는 이불을 당겨 잘 덮어 주려 했고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제, 김기태가 여기로 실려 왔어."
그녀의 손이 굳는 게 느껴졌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제 구치소로 송치되고 자살 시도를 한 것 같아. 너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눈에 두려움이 한가득이었다.
"자살 시도를? 왜? ...설마 계획적으로? 너 여기 있는 거 알고...?"
그녀는 내가 미처 생각도 못 해 본 시나리오를 읊었고, 나는 조금 당황했다.
"너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내가 농담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그녀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갑자기 걔가 왜 자살 시도를 해? 걔가 그럴 놈이야? 이해가 안 돼. 여기에 니가 있는 걸 알고, 너를 해코지하려고 계획한 거 아니야!?"
나는 이 와중에도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참 엉뚱하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돼. 김기태는 수술을 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고, 아마 진짜로 죽을 작정이었던 것 같아."
내 말에도 아직 그녀는 불안해 보였다. 어쩌면 그녀는 차라리 이렇게 믿고 있는 게 나은 걸지도 모른다. 이 일에 진짜로 민유정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진영이는 감당할 수 있을까?
"잠깐만... 그럼 너 복도에 있었다는 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김기태 수술 끝날 때까지... 그 복도에 있었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찌릿한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번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아직 옆구리가 아픈 상태라고.
"많이 놀랐지. 무서웠겠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내게서 몸을 조금 떨어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네가 형사고, 이런 일이 익숙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밤에 너 혼자서, 그런 상황을 마주했다는 게 너무 싫다. 내가 집에 가지 말걸... 그랬으면 니가 김기태를 마주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나는 살짝 떨리고 있는 그녀의 팔을 감싸 안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왜 매번 모든 걸 다 네 탓이라고 여기는 거야.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그냥 나는 니가 김기태가 실려 오는 걸 직접 봤다는 게 너무 싫어. 그 수술실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니 마음이 얼마나 지옥이었을지..."
그녀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삼켰다. 나는 내가 실려 온 날 그녀가 얼마나 무서웠을지를 지금 이 대화에서야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금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내 수술실 앞에 혼자 앉아 있었을 그녀를 떠올렸다.
나는 그녀를 온 힘을 다해 꽉 끌어안았다. 옆구리 통증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작은 떨림이 멎을 때까지 힘껏 안고 있었다.
한참을 안고 있다가, 그녀가 말을 꺼냈다.
"김기태가 깨어나고 나서 널 또 죽이려고 하면 어쩌지?"
나는 그녀를 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행여나 이제 와 진짜 그럴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걱정하지 마."
"거의?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거잖아?"
"아니, 불가능해."
"니가 어떻게 알아."
"불가능해."
"우기지 마."
"너나 우기지 마."
우리는 부둥켜안은 채 괜히 투닥거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드르륵 열렸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정의였다. 아마도 당직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듯 보였다.
"야! 강우진! 너 이 새끼...!!"
그는 잔뜩 화를 내며 들어왔지만, 부둥켜안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진영이는 후다닥 내게서 떨어져 앉았다.
"아, 미안. 진영이 와 있었구나."
그는 멋쩍어하며 진영이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엄청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나 홍정의인데. 기억해?"
"그럼, 기억하지.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나는 정의를 한 번에 알아보는 진영이를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몇 번을 봐도 못 알아봤으면서. '슈퍼히어로 반장'은 한 번에 알아보다니.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일어난 그녀는 정의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야, 손 잡지 마. 떨어져."
내 말에 그 둘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진영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의는 얼른 와서 내 옆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너 뭐야. 내가 병실로 가라고 했지! 대체 니들은...!"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췄다. 그리고 진영이 눈치를 보는 듯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나를 보고 눈빛으로 '말을 해도 되는지' 동의를 구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진영이는 '니들'이란 단어를 지나치지 않았다.
"새벽에 누가 같이 있었어?"
그녀의 질문에 나는 정의를 째려봤고, 그는 내 눈을 피했다.
그녀에게 민유정이 왔다는 사실을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들키면, 내가 괜히 숨긴 것이 되어 버려서 곤란한데...
"뭔데. 누가 있었던 건데."
"...민유정."
내 대답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놀람이었다가, 곧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더니, 마지막에는 화가 난 표정으로 굳었다.
"그 시간에 걔가 여기를 왜 와? 너 만나려고 온 거야? 면회 시간도 아니었잖아. 뭐야? 어떻게 들어왔다는 거야?"
진영이가 질문을 쏟아내는 동안 정의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 시간에 왜 민유정이 거기에 왔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내가 불렀어."
내 말에 둘 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나를 집에 보내 놓고, 그 시간에 민유정을... 불렀다고...?"
"아니!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답답해서 눈을 질끈 감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누가 들어도 이상한 상황이긴 한데, 일단 우진이 말을 좀 들어 볼까?"
정의는 진영이가 뒤로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 듯 그녀를 달래며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앉으면서도 시선을 내게서 떼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일부러 너를 보내고 부른 게 아니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지금은 자세하게 말하기가 좀 어려워. 나중에 정리가 되고 나면 그때 말해 줄게. 그래도 니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뭐,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정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김기태 때문이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알겠어... 나중에 니가 말할 수 있을 때. 다 얘기해 줘."
"고마워..."
"그럼 그거 말고 내가 더 알아야 할 건 없는 거지?"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전 새벽, 로비에서 마주쳤던 민유정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걸 굳이 얘기해야 할까? 하지만 그 짧은 망설임을 진영이가 놓칠 리 없었다. 그녀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뭐가 더 있어?!"
"아니 며칠 전에도 민유정이랑 새벽에 로비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쳤는데..."
"우연?"
그녀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이럴 줄 알았다.
"아니 진짜로 우연히..."
속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하긴, 내가 들어도 안 믿기겠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번만큼은 정의도 편들어 줄 말이 없다는 듯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결국 김기태와 민유정의 관계를 꺼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명할 수 없었다.
"...전에 내가 민유정을 의심한다고 했던 말 기억해?"
진영이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흘린 말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맞춰 보고 있는 듯했다.
"김기태랑 민유정은 니가 전학 오기 전에 원래 사귀던 사이였다고 했잖아. 네가 전학 오고 민유정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고... 그땐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정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니었다니?"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 그냥 내 추측일 뿐이라서. 그래서 그 추측을 확인해 보려고 어제 민유정을 불렀어."
"그랬는데 걔가 그 꼴로 여길 달려온 거구나."
"응..."
정의는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곱씹는 듯했다. 진영이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럼 김기태가 너를 질투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닐 거야. 근데 지금은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고, 또 머리가 정리가 안 돼서...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일단 그냥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줄래?"
나는 애원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먹혀들길 바라면서. 사실 민유정은 이미 내 앞에서 많은 걸 털어놓았지만, 아직은 그녀에게 그 말까지 할 자신은 없었다.
진영이는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풀었다.
"...알겠어."
그제야 참았던 숨이 새어 나왔다. 그 틈을 타 정의가 자연스럽게 진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진영아, 점심시간 다 돼 가는데 너 밥 먹고 와. 내가 여기 있을게."
진영이는 정의를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그럼 나 밥 먹고, 쟤 뭐 좀 먹일 만한 것도 사서 올게. 너 커피 마실래?"
"응, 좋지. 나 얼죽아야."
"알겠어."
나는 차마 이 분위기에서 '나는?'이라고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진영이가 병실을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정의가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윤진이한테 예전에 들은 얘기가 좀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들은 얘기라니?"
"윤진이가 유정이랑 좀 친했던 거 기억하지."
"응."
정의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서 몇 번이나 고쳐 잡았다.
"남의 얘기라 내가 함부로 해도 되는 건지... 하, 근데 아무래도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
"뭔데 그래?"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그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민유정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했어. FWB라는 말 알아? 나도 그때 처음 들어봤는데 Friends with benefits. 다시 말해 성적인 관계를 하는 친구 사이를 의미하는 거더라고."
낯선 단어가 머릿속에서 한참을 겉돌았다.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어야 했다.
"윤진이 말로는 유정이가 쉽게 대하는 남자가 하나 있댔어. 필요할 때 불러서 관계를 갖지만 사귀는 건 아니라고 했고. 그리고 그 남자는 유정이 말이면 뭐든 다 들어준다더라. 나는 사실 그때는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서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거 김기태가 아니었을까? 내가 너무 비약하는 건가?"
"그 말을 언제 들은 건데?"
"좀 되긴 했어. 20대 초반?"
정의의 말이 사실이라면, 민유정과 김기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사이였다. 그래, 민유정의 성격이라면 친구 앞에서는 김기태를 FWB니 뭐니 하며 깎아내렸겠지. 하지만 그건 겉으로 하는 말일 뿐, 둘은 여전히 서로에게 놓을 수 없는 존재였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앞뒤가 들어맞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니가 아까 한 말은 뭐야, 민유정을 의심한다니?"
"실은 김기태가 출소하고 한동안 진영이를 노렸었어."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정의에게 털어놓았다. 면회 기록이나 통화 내역처럼 수사로 알게 된 것들은 빼고,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만 하나씩.
동창회에서 민유정이 폭발했던 일, 그 뒤로 김기태가 진영이 집 앞까지 찾아와 공격했던 일, 창문을 깨 놓고 사라진 일, 그 바람에 진영이가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된 일. 그리고 그 집에 민유정이 다녀간 뒤, 내가 김기태를 맞닥뜨린 일까지.
말을 하는 동안 정의는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좁힌 채 무언가를 곰곰이 맞춰 보는 얼굴이었다.
"유정이가 알려 준 거네."
잠깐의 침묵을 깨고 내뱉은 그의 말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것을 정면으로 들이밀었다. 민유정의 입으로 직접 들었는데도, 나는 아직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너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리가 안 돼?"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는 믿고 싶지 않아 하는 내 표정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눈이 머는 법이지."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추측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