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살인

나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byAltusSolum

살인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목숨을 끊어야만 살인일까? 물리적인 숨통을 끊는 것만이 범죄로 규정되는 세상에서, 이 질문은 우리 슬롯가 교묘하게 외면하고 있는 관계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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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레너드 셴골드(Leonard Shengold)는 저서 <영혼살인(Soul Murder)>에서 타인의 자아를 지속적으로 착취하고, 그 정체성과 존엄성을 짓밟아 무력화하는 행위를 가리켜 '영혼살인'이라 명명했다. 이는 반드시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다. 타인의 취약성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정서적으로 방치하거나 기만함으로써 한 인간이 세상을 향해 뻗어갈 기쁨과 생명력을 체계적으로 박탈하는 것. 그리하여 육체는 살아있으나 내면은 철저히 파괴되어 빈 껍데기처럼 남겨지는 상태, 그것이 셴골드가 경고한 관계 속의 참혹한 살인이다.


최근에 유행이 아주 오래전에 지난 두 편의 소설을 읽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스크린화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배우 데이지 에드거-존스(Daisy Edgar-Jones)가 주인공을 역할을 맡았다.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과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은 바로 이 '영혼살인'이 일상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자행되는지, 그리고 그 파괴적인 굴레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들은 사실 바카라이 천만배는 좋은데, 드라마나 영화도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영상이 구현해 낸 자연의 광경과 시각적 묘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때로는 배우의 압도적인 수려함이 원작이 의도한 처절한 고립감을 희석시키는 듯한 아쉬움도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은 파괴적인 굴레 속에서 한 인간이 기어코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텍스트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기침 한 번에 뒤바뀌는 얄팍한 배타성

두 작품의 주인공 카야와 메리앤은 철저한 '이방인'이다. 가족에게서 온전한 보호를 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속한 작은 슬롯(마을과 학교)에서도 지독한 배타성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주위에서 던지는 혐오와 배타성은 사실 한낱 기침 한 번으로도 방향이 바뀔 만큼 피상적이고 얄팍하다. <노멀 피플>의 메리앤이 고등학교 시절 끔찍한 왕따였다가 대학 진학 후 단숨에 무리의 중심이 된 것은 그녀 자신이 변해서가 아니다. 그저 주변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 역시 평소에는 '늪지대 쓰레기(The Marsch Girl)'라 불리며 철저히 배척당했지만, 마을의 악당은 체이스는 그녀의 외로움을 은밀히 탐취하려 들었고 훗날 성공한 작가가 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경이로움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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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이 이방인들이 고독의 무게에 짓눌려, 타인이 자신을 온전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만적인 온기를 맹목적으로 붙잡을 때 발생한다. 뼛속까지 시린 절대적 고립보다는, 나를 갉아먹는 관계라도 쥐고 있는 편이 낫다는 처절한 방어기제. 이 가여운 심리는 오늘날 수많은 착취적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본질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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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폭력보다 상처깊은 순응적 배신

그렇다면 이들의 영혼을 살해한 진짜 주범은 누구일까? 카야를 성적으로 유린하고 통제하려 했던 체이스 같은 명백한 포식자만이 가해자는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절망은 그들을 온전히 사랑했다고 믿었던 이들에게서 온다. <노멀 피플>의 코넬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테이트는 분명 메리앤과 카야를 사랑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들은 상대를 고립된 세계에 방치한 채 도망쳤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특히 견고한 또래 집단의 인정과 서열에 민감하도록 슬롯화된 이들은 집단의 압력(Peer pressure)을 쉽게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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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은 학교에서 자신의 슬롯적 지위가 흔들릴까 두려워 복도에서 메리앤을 모른 척했고, 졸업무도회에 함께하지 않았다. 테이트 역시 대학이라는 '정상적인'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늪지대의 카야를 외면했다. 그들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남겨진 이의 고통이 사라지거나, 시간이 지나 더이상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코넬이나 테이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진심을 자각하고 사무치게 반성하지만, 이 과정속에 우리가 읽은 인간의 비겁함은 본성의 씁쓸한 진실을 증명한다. 인간에게 있어 무리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때로 사랑보다 훨씬 강하다. 사랑보다 '순응'이 우위에 서는 순간, 방관과 침묵은 그 자체로 영혼을 살해하는 공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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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려야만 타인도 존중할 수 있다

슬롯의 위선은 가혹하다. 체이스가 은밀하게 카야를 착취하고 폭력을 가할 때 철저히 방관하던 마을 사람들은, 그 포식자가 죽음을 맞이하자 카야를 단두대에 세우려 한다. 수차례 인격을 살해당하고도 '법과 도덕'이라는 명분 아래 그저 인내해야만 하는가? 위선적인 다수의 슬롯가 결코 지켜주지 않을 때, 이방인은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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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의 선택은 단호했다. 그녀는 늪지대의 자연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자신을 파괴하려는 포식자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다. “궁지에 몰리고, 절망하고, 고립되었을 때 인간은 오직 생존만을 향하는 본능으로 회귀한다.(When cornered, desperate, or isolated, man reverts to those instincts that aim straight at survival).” 인간 슬롯의 잣대로는 명백한 '살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만약 카야가 마을에 도움을 청했더라도, 기득권층인 체이스가 정의로운 판결을 받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애초부터 체이스는 그래서 더 쉽게 카야를 괴롭힐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카야의 행동은 생명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려는 '코나투스(Conatus)'의 발현이자 정당한 생존본능에 의한 방어였다. 메리앤 역시 자신을 갉아먹던 파괴적인 관계들을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끊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코넬과 서로를 '수단'이 아닌 온전한 '목적'으로 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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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가 오직 '나'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나침반의 바늘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내가 아님을 깨달은 순간에도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 자신을 파괴적인 관계 속에 방치할 때, 영혼살인은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는 타인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도덕률을 넘어 훨씬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나를 살려내야만 타인도 존중할 수 있다." 누군가 나의 취약성을 함부로 착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기만과 폭력의 늪에서 기어코 나 자신을 구원해 내는 것. 그것은 결코 이기심이 아니라 존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가장 숭고한 투쟁이다. 영혼의 살인자들로 가득한 이 무자비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결국 나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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