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aret Fuller

Today a Reader, Tomorrow a Leader

byAltusSolum

TRTL, Today a Reader Tomorrow a Leader는

마가렛 풀러(Margaret Fuller, 1810 – 1850)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북 클럽의 이름이기도 했다.


풀러에 대해 알아보자.

1810년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풀러는 하원의원이었던 아버지 티모시 풀러로부터

당시 소년들에게나 제공되던 수준 높고 엄격한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

3세에 읽고 쓰기를 시작했고, 고전 문학, 라틴어, 현대 외국어에 통달하며

30대에는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남녀를 통틀어 '가장 바카라을 많이 읽고 박식한 인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하버드 대학 도서관 출입을 허락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ㅇ'지적 토론장 : 대화(Conversations)'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족의 생계를 바카라임지기 위해 교사로 일했다.

1839년부터는 보스턴에서 여성들을 위한 세미나 형식의 '대화(Conversations)' 모임을 이끌었다.

이는 고등 교육에서 배제된 여성들에게 철학, 신화, 예술, 역사 등을 치열하게 토론할 기회를 제공하여,

여성의 지적 자립과 훗날 여성 권리 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ㅇ 초월주의 운동과 <다이얼(The Dial)> 편집장

1840년, 랠프 월도 에머슨의 제안으로 미국 초월주의 사상의 핵심 기관지인 <다이얼(The Dial)>의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이를 통해 그녀는 초월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인정받았으며, 당대 미국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다.

ㅇ <뉴욕 트리뷴>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

1844년 뉴욕 트리뷴에 합류해 250편 이상의 칼럼을 집필하며 문학 비평뿐만 아니라 감옥 개혁, 노예제 폐지, 여성 인권 등 당대의 민감한 정치·슬롯적 이슈를 날카롭게 비평했다.

<다이얼>에 연재했던 글을 확장하여 <19세기의 여성, 1845> 발간했다. 여성은 종속적 존재가 아닌 영적·지적으로 완전한 자립을 이룰 수 있는 주체임을 천명했다.

ㅇ 유럽 특파원 활동과 비극적인 최후

1846년 <뉴욕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 자격으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혁명의 현장에 함께 했다.

이탈리아에서 귀족 출신 급진주의자 조반니 오솔리와 연을 맺어 아이를 낳았고,

주세페 마치니와 연대하여 로마 공화국 혁명에 직접 뛰어들었다.

단순한 기자를 넘어 부상병을 돌보는 등 실천적 투쟁을 이어갔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185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오던 중,

미국 고향 땅을 불과 50야드(약 45미터) 남겨둔 상황에서 거대한 허리케인을 만나 배가 좌초되었고

40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풀러는 제도적 장벽에 순응하지 않고 지성(Intellect)을 무기로 한계를 돌파해 낸 사상가이자,

관념적 철학을 넘어 언론과 혁명의 현장에서 시대의 모순과 싸웠던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풀러의 삶이 더욱 감동적인 이유는 초월주의와 에머슨, 소로우와의 지적교류 때문이다.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초월주의는 18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보스턴 중심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적, 문학적, 종교적 혁신 운동이다.

"인간의 내면과 자연에는 경험이나 논리를 뛰어넘는(초월하는) 신성한 진리가 존재하며,

개인은 낡은 제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직관(Intuition)을 믿고 자립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초월주의가 어떻게 미국 사상사 전반으로 뻗어나갔는지 입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이 3명을 이해하면 된다.

ㅇ 랠프 월도 에머슨 (이론가): 초월주의 철학의 뼈대를 세우고 비전을 제시한 '브레인' 역할

ㅇ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실천가): 에머슨의 사상을 자연 속에서의 삶과 국가 시스템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체화해 낸 '손과 발' 역할

ㅇ 마가렛 풀러 (확장자): 개인의 영적 해방이라는 관념적 철학을, 여성과 억압받는 자들의 슬롯적·제도적 해방 운동으로 끌어올린 역할

또한 풀러와 에머슨은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서 정신적으로 깊이 교감했지만,

근본적인 기질의 차이와 철학적 지향점 때문에 발전할 수 없었다.

풀러는 매우 열정적이고 전인격적인 영혼의 결합을 원했다.

반면 에머슨은 본질적으로 내향적이고 이성적인 학자로

풀러가 끊임없이 감정적 한계를 허물고 다가가려 할 때마다

에머슨은 뒷걸음질을 쳤다.

또한 에머슨은 풀러의 압도적인 에너지와 감정적 요구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영혼이 척박한 사람(inhospitality of soul)"이라고 부르며,

두 사람 사이에 도저히 녹일 수 없는 '얼음 장벽'이 존재한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은 지적으로는 완벽한 동지였으나, 정서적으로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귀국하던 풀러 가족의 배가 난파되어 모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은 에머슨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그는 즉시 절친한 동지인 소로우에게 돈을 쥐여주며 사고 현장으로 급파했다. 소로우의 임무는 풀러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는 것과, 풀러가 이탈리아에서 완성해 출판을 앞두고 있던 '이탈리아 혁명사' 원고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소로우는 해변을 이 잡듯 뒤지고 생존자들을 인터뷰했지만, 야속하게도 해변의 약탈자들이 이미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결국 소로우는 풀러의 시신도, 그녀의 필생의 역작이었던 원고도 찾지 못한 채

낡은 외투와 단추 몇 개만 수습하여 허망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가장 치열하게 시대를 앞서갔던 사상가가,

고국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혁명의 기록과 함께 바다 깊은 곳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에머슨은 풀러가 죽고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I have lost in her my audience.(나는 그녀와 함께 나의 청중을 잃었다.)"

"I hurry now to my work admonished that I have few days left.

(내게 남은 날이 얼마 없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은 듯, 나는 이제 서둘러 내 작업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