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onharuㅡ나의 꿈입니다.
눈이 떠졌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진 건 멈춰있는 펜의 묵직한 무게였다.
onharu ㅡ.
소희는 그 이름이 새겨진 노트커버를 바라보았다.
노트 안에는 방금까지 쓰던 문장이 중간에서 뚝 끊겨 있었다.
몇 번을 썼다 지운건지,
꾹꾹 눌러가며 쓴 글씨 자국들만이 종이에 가득했다.
곧 마감이었다.
다음 주까지 글을 업로드해야 하는데,
벌써 세 시간째 똑같은 문단에서 맴돌고 있었다.
'하…지독하게 안 써지네.'
onharu의 손이 펜을 내려놓더니 지친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소희에게도 그 피로감이 전부 느껴졌다.
그때 가방 속 스마트폰이 울렸다.
담당 편집자였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진행 상황 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거의 다 되어가요."
"그러세요.. 하하 다행이네요.
작가님, 조금만 더 힘 내주세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진실은 전혀 달랐다.
전화를 끊은 onharu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노트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라도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는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 작가도 매번 쉽게 글을 쭉 써 내려가는 건 아니라는 것을,
늘 스스로를 의심하고 고쳐 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쓰고 또 쓰는 거였다.
onharu는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근처 카페에 들러 후배 작가와 이야기를 나뉬다.
아이스커피를 사이에 두고 후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는 안 불안해요? 내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안 들어요?"
onharu는 한참 동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고심 끝에 대답했다.
"당연히 불안하지... 나도 매일 불안해...
근데, 불안한 거랑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거랑은 다른 것 같더라고... 내 선택이었으니깐 뭐..ㅎㅎ"
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쾌한 정답을 들은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느끼는 흔들림을 누군가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살짝 편해진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희의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울렸다.
'이 사람도 완벽하지 않구나,
나처럼 매일 흔들리고 있었어.'
이상하게 소희도 후배처럼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혼자만 길을 잃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따스한 위안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onharu는 다시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신도림 방향.
가방 속에서 낡은 노트들이 묵직하게 부딪쳤다.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글의 흔적들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onharu는 바카라상 깊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예전 노트 몇 권을 꺼냈다.
마감이 막히고 답답할 때마다 찾아오는 오래된 습관 같았다.
자신이 처음 썼던 흔적을 들여다보며 다시 길을 찾는 것.
가장 오래된 첫 번째 노트를 펼쳤다.
손 글씨가 지금보다 한참은 서툴고 삐뚤삐뚤했다.
'오늘 지하철에서 너무 지쳐 보이는 남자를 봤다. 괜찮다면 내가 대신 출근해 주고 싶었다. 그 무거운 어깨를 가만히 툭툭 쳐주고 싶었다.'
그 문장 앞에서 소희는 심장이 쿵 ㅡ 내려앉았다.
그건 소희 자신이 2호선에 탑승해 강진우를 처음 바라보았던 그 아침마음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거, 내가 쓴 것 같아.'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약간 소름이 차올랐다.
onharu는 그 페이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피식,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소희도 그 감정을 함께 느꼈다.
처음 느낀 그 마음을 기록으로 여전히 다시 기억할 수 있다는 반가움.
노트를 한 장씩 더 넘겨보았다.
잘 쓰인 날도 있었고, 단 한 줄도 적지 못한 날도 있었다.
노트의 한 페이지에는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서툰 질문들이 빼곡했다.
완벽한 작가의 삶이 아니었다.
그저 매일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적어 내려간 기록들...
소희는 그 서툴고 솔직한 흔적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오늘의 체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체험입니다.]
좀 전까지 작가의 집이었는데,
지금은 다시 2호선 지하철 안 이었다.
소희는 손잡이 봉을 잡고 서 있었다.
여전히 그 노트들에 쓰여 있던 글이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시스템의 알림이 비로소 실감 났다.
하지만 쓸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담담하게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싶을 뿐이었다.
소희는 가방에서 자신의 자그마한 노트를 꺼냈다.
첫 장부터 차근차근 넘겼다.
강진우의 피로, 서아영의 열정, 현우 엄마의 애틋함,
박성우의 기타 선율, 정숙 여사의 온기, 혜미와 친구들의 웃음,이름없는 그,역무원의 묵묵함, 승범의 서투른 열정, 이름 모를 콘서트남의 리듬,외국인 커플의 눈으로 본 색다른 느낌,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서준의 두근거림.
체험 후 틈틈이 적어 두었던 자신만의 느낌과 묘사들.
마지막으로 비어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소희는 가방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onharu라는 멋진 작가를 그대로 따라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자신만의 글을 위해 고심하고, 초심을 찾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가슴속 무언가가 점점 뜨겁게 커지는 것을 느꼈다.
소희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보고 느낀 그 감정과 여러 삶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제는 자신이 직접 쓴 글로 담아내고 싶었다.
소희는 펜 끝을 종이에 대고, 조용히 마음을 담아 적어 내려갔다.
'처음으로 마음속 뭔가가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시작해 볼 용기를 얻었다.'
단 한 줄의 짧은 문장이었지만,
글자를 써 내려간 순간,
자신의 진짜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마음이 한결 가볍고 부드러워졌다.
소희는 까만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onharu와 닮아 있었지만,
그냥 온전히 소희 자신이었다.
이제야, 자신이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전동차는 어느새 신도림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