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와 헤겔 그리고 한국 정치의 교집합을 찾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정치는 운명의 힘이라는 포르투나와 그러한 격류에 맞서 그것을 헤어 나가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역량인 비르투 사이의 충돌이며 마찰이고, 끝내 그것은 투쟁이다. 마치 이건 파도에 맞서 제방을 쌓아 그것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에 기반한 결단적인 역량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나는 포르투나를 운명, 즉 시대정신이라 보고 싶다. 물론 시대정신은 이성의 총체이고 마카아벨리가 말한 포르투나는 자연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논지를 세우고자 한다. 헤겔은 역사가 이성에 따라 흐른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흐르게 하는 것은 그 시대 상황이 개인으로 하여금 불러일으키는 열망, 욕구, 충동이다. 그 둘, 시대의 정신과 인간의 반항은 언제나 서로 충돌하고 맞물리고 합쳐져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새로운 결과를 헤겔은 나아감이라고 보았다.
포르투나와 비르투는 마치 헤겔이 말한 정반의 변증과도 같다, 기본 시대정신으로 대변되는 포르투나, 즉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이게 맞다고 받아들여지는 진리가 테제라면, 보통의 인간은 그것에 비판하려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다. 순응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동양적 사고에서는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때가 많다. 나아감보다도 기본 자연에 순응하고 그것을 거스르려 하기보단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비르투 없이 포르투나를 그저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의 철학은 서양의 관점과 참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근대철학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마키아벨리는 이것에 맞서 반항하는 개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발전을 기원으로 삼는 근대적 이성의 개념은 동양적 사고에서는 상당히 특수하다. 그리고 그러한 나아감은 결국 이성 위주의 서양철학을 주류로 만들고야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관계주의적 사고와는 유리되어 있기에 아직도 서구 이성이 완벽히 우리나라에서 현지화 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 비르투란 순응을 거스르는 인간 이성 기반의 힘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게 안티테제라고 생각한다. 진테제는 결국 그러한 포르투나와 비르투 사이의 투쟁 끝에 나아간다.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치철학의 시작인 이유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그건 그러니 그냥 받아들여라고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즉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반항한 인물이 결국 비르투를 실현한 인물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한국이 기본적으로 동양의 국가이기에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그러한 인물을 꼽는 것은 정말로 쉽지가 않다. 하지만 굳이 꼽아야 한다면 나는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꼽고자 한다. 한국 슬롯에서 암암리에 테제라 받아들여지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저 운명이라 받아들여지는 한국슬롯의 구조적 특질이란 무엇인가?
노무현 집권기에는 수도권의 집중화와 권위주의, 그리고 진보의 진영에서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져 왔던 한미 FTA의 거부일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정에서의 정치인은 그 자신의 지지기반에 순응하는 것이 포퓰리즘적 미덕이라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반항하였다. 한미 FTA는 그의 비르투를 전적으로 상징하는 일화라 봐도 무방하다. 당시 진보 진영 내에서 한미 FTA 거부란 그야말로 성문화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생각에서의 국익이라는 판단하에 그는 한미 FTA를 단독으로 강행하였다.
또한 부동산에 치중된 여진 자산 불균등 현상은 그 시절에도 나타난 상황이었는데, 어느 정도의 제약을 걸기 위해, 많은 정치인들 및 소득분위 상위분위의 사람들에게 부동산이 집중된 상황에서 종합부동산세를 시행한 점도 굳이 따지자면, 비르투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조세 전반이 운명을 거스르는 경향성을 띄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은가? 당연한 말이지만, 조세의 징수와 정부지출 그리고 이에 따른 슬롯보장은 그 슬롯의 상태를 자연상태와 상당히 달리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세목을 만든 것 만으로 이것이 자연상태를 바꾸려는 반항이라 볼 수가 있다.
또한 지역주의를 생각해 보자. 일극화 체제란 이미 수많은 기득권과 정치인이 그것을 테제, 성문화하여 그것을 고착화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것은 해결된 과제가 아니고 이미 심각해졌기에 한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성 그리고 그 발전과정의 특수성에 입각해 봤을 때 일극화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것에 대해 일개 한 사람으로서 비록 실패했지만 수도이전계획을 세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끝내 그가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르투가 실패했다 보일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와 비르투를 설명하면서 시대의 흐름과 인간의 행동 방식이 일치하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의 정치인생이란 결국 마키아벨리적 관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사정들은 모두 차치하더라도 그의 치적 전반이 거대한 서양적 근현대 정치철학 담론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른다.
그저 모든 것이 가치판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