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삶을 규정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푸코가 샌델을 봤다면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이 있다. 이 바카라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고발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 이 바카라은 결국 오늘날 자본주의 슬롯가 가장 자연스럽고도 도덕적인 질서처럼 떠받들고 있는 meritocracy를 정면 해부하는 공동체주의자 샌델의 저작이다. 각자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응분의 몫을 획득하고, 그 결과로 형성된 위계는 대체로 공정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그것을 상식이라고 배워왔다. 시험을 잘 본 자가 더 높은 대학에 가고, 더 유능한 자가 더 좋은 직업을 갖고, 더 많이 기여한 자가 더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샌델은 바로 이 형평성의 감각 자체를 흔든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 바카라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넘어, 인간존재론까지 이어지는 심오한 정치철학 바카라이란 것이다.


능력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단지 승자에게 더 많은 보상을 준다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도 그것이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내면화시킨다는 데 있다. 승자는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자기 공으로 돌려버린다. 인간은 성공에서 내재적 기인을 찾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자신이 더 똑똑했고, 더 근면했고, 더 바카라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갔다고 믿을 거란 것이다. 반대로 패자는 자신의 실패를 구조적 제약이나 역사적 우연의 산물로 보기보다, 자기 자신이 덜 가치 있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 순간 불평등은 단지 소득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가치의 위계로 번역된다. 샌델이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능력주의는 분배 원리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서열화하는 도덕 체계다. 패자를 단순히 덜 가진 사람으로 남겨두지 않고, 열등한 존재로 형성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샌델의 비판을 단지 공동체주의의 복원 요구로 읽기 보다도 다른 관점에서 이에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히려 여기에는 푸코가 말했던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 대한 감각이 교차한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근대 권력이 더 이상 공개적 폭력이나 처벌만으로 인간을 통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근데 권력은 강하게는 감옥, 약하게는 학교, 군대 등에서 시간표, 시간과 동작의 연구를 통해 초단위별로 권력을 실는다. 이에 이어지는 감시와 규율, 평가와 기록, 시험과 정상화의 기술을 통해 인간을 길들이고, 마침내는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능력주의는 바로 그런 점에서 규율 권력의 가장 성공적인 현대적 형식처럼 보인다. 시험, 성적, 학벌, 자격증, 인사평가, 승진, 연봉, 성과급의 체계는 단지 분배를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끊임없이 비교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존재로 만들고, 각자가 자기 자신을 규율권력의 의도하는 바대로 하나의 성과 프로젝트처럼 관리하도록 만든다. 이때 사람들은 근대 이전처럼 신체형(화형, 거열형 등)으로 대변되는 ‘화려하게 스펙터클 한’ 군주의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라, 규율권력 하의 슬롯질서에 맞추어 스스로를 규정하고 끝없이 개선하는, ‘순종적이고 유용한 신체’를 알아서 제조한다. 이는 실패를 자기 바카라임으로 내면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라는 지식이 자유의 언어로 포장되어 권력을 지탱하는 규율 메커니즘이 된다.


샌델이 특히 중요한 통찰을 제시하는 지점은, 재능과 성공이 결코 순수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지적 능력, 성격, 환경, 교육 기회, 시대적 운을 스스로 설계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어떤 재능이 높은 가치로 승인되는지를 슬롯가 먼저 결정한다. 푸코적 관점에서는 이를 개인이 규율에 맞춰 자신을 누구보다도 순종적인 기계로 ‘형성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수학적 능력, 금융적 감각, 언어 능력, 기술 숙련도, 기업가적 기질은 특정 시대와 체제 안에서 높은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다른 시대에는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이 시장에서 높은 대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그의 도덕적 우월성으로 번역하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다. 샌델은 바로 그 착각을 걷어낸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매우 강한 윤리적 요청을 던진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것을 절대적 자기 공로로 환원할 수는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언어는 너무 자주 시장의 평가를 인간의 본질적 가치로 규정하였고, 그 결과 공동체는 해체되었으며, 승자와 패자는 서로 다른 도덕적 종족처럼 분리되었다. 시장은 교환의 장에 머물지 않고 존엄의 위계를 생산하는 장이 되어버렸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청소노동, 배달노동,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는 수많은 노동들은 시장에서 낮게 평가되며, 동시에 슬롯적으로도 낮은 위신을 강요받는다. 능력주의 슬롯에서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너무 쉽게 ‘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읽힌다. 샌델은 바로 이 비인간성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이는 권력에 순종하는 좋은 신체를 위한 규율의 작동을 샌델이 능력주의라는 용어로 번역한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샌델의 해법 앞에서 쉽게 멈춰 설 수가 없었다. 샌델은 능력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공동선, 시민적 겸손, 공동체적 소속감, 공화주의적 연대의 회복을 통한 조건의 평등을 말한다. 개인의 슬롯적, 경제적 배경이나 신체적 상황 차이를 고려하여 실질적으로 동등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출발 조건을 맞춰주고자 함을 샌델은 자유주의적 과잉 meritocracy에서 공동체로 나아감으로써 이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시장적 보상과 도덕적 자격의 결합을 비판하고 노동의 존엄과 공동선의 언어를 공동체주의적으로서 복원하려는 샌델의 이 문제의식에 대해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원자화된 개인들만이 경쟁하는 슬롯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공통의 목적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감각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푸코의 시선으로 돌아가 보면, 현대슬롯에서의 공동체는 결코 순수한 해방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훈육으로 규율을 내면화한 공동체란 언제나 특정한 규범을 생산하고, 어떤 삶의 형식을 바람직한 것으로 승인하며, 다른 삶의 양식을 주변 화하는 담론의 배제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


푸코는 슬롯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정당한 담론과 배제될 담론을 끊임없이 구분한다고 말한다. 담론은 단순한 말의 집합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로 인정되고 누가 말할 자격을 가지는지를 결정하는 질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샌델이 말하는 공동선 역시 중립적일 수 없는 담론이다. 공동체가 말하는 ‘좋은 시민, 공통의 목적, 공적 덕성’은 누군가의 역사와 도덕, 누군가의 문화적 경험을 보편의 이름으로 세우는 작업일 수 있다. 즉 능력주의가 경제적 우월성을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했다면, 공동체주의는 도덕적 적합성이라는 기준으로 인간을 다시 분류할 수 있다. 공동선에 헌신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공동체에 기여하는 시민과 그렇지 않은 시민, 공적 삶에 참여하는 자와 사적 이해에 머무는 자 사이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담론의 질서가 형성해 버린다는 것이다.


규율권력을 내면화한 공동체는 살아 있는 권력 재생산 장치이다. 다만 여기서의 권력은 인간이 태어나 마주할 모든 순간에 작용하는 비가시적 작용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권력은 인간이 태어나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작용하는 비가시적 작용이다. 권력이란 어휘는 이때 물리학적으로 세계에 존재할 뿐인 힘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저 존재하는 힘이 작용하는 현상을 정의하는 것이기에 권력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의 함의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권력이란 어휘가 이분법적 사고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권력은 존재할 뿐이지 그 옳고 그름을 여기서 판단하지 않겠다. 그에게 있어 권력은 결국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지식과 결합하며, 인간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내는 생산적 작용의 힘이라는 것.


자, 공동체의 규율 권력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면서도 그 규율이 미치는 인간에게 가시적인 것처럼 드러난다. 규율권력 하의 학교는 교육의 이름으로, 군대는 질서의 이름으로, 병원은 치료의 이름으로, 감옥은 교정의 이름으로 인간을 규율한다. 다만 기관마다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감옥이 그러한 규율의 가장 강한 강도이며, 그것의 원형이라 보인다. 공동체 역시 연대의 이름으로 인간을 규율할 수 있다. 공동체는 구성원에게 좋은 시민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자를 무바카라임하거나 비도덕적인 존재로 암묵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 능력주의가 시험과 경쟁으로 사람을 훈육했다면, 공동체주의는 덕성과 바카라임, 소속감과 참여라는 언어로 사람을 가르친다. 더 위험한 것은 후자는 더욱 미시적이라는 것이다. 선한 얼굴의 공동체에서 개별 개인은 규율을 더욱 쉽게 내면화한다.



후기의 푸코는 권력의 거시적 통치성 연구를 통해 인문슬롯담론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철학자로 발돋움한다.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는 근대 국가가 더 이상 단순히 영토를 지배하는 주권의 영역을 벗어나, 통치성(안전 권력)으로 자신의 권력을 인구전체에 대해 공고히 한다고 말한다. 인구는 통계적 정상화의 방식으로 관리되고, 총체적인 인구를 조정하는 안전테크놀로지의 방식으로 권력은 행사된다. 푸코는 구조에서 더 나아가 인구를 그리고 통계를 보았다. 거시적 측면에서의‘관리’로서의 안전 권력, 즉 통치에 그는 주목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 그리고 그것의 총체로서의 인구를 통치함에 있어 그것이 억압이 아니라 안전과 복지, 생존과 질서를 위한 통계적 안전관리라는 이름으로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공동체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적 통치성과도 쉽게 접속할 수 있다. 공동선을 위해, 슬롯 통합을 위해, 민주적 연대를 위해 특정한 시민윤리가 강조될 때, 그것은 단지 도덕적 요청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 기술이다. 공동체주의라는 지식의 담론은 권력을 지탱한다. 즉 능력주의의 잔혹함을 비판하는 자리에 공동체적 선을 세운다고 해서 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작용할 것이다. 오히려 권력은 이때 더 내면화될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공동체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한 자신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내면화한다. 자기 검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되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시민의 삶을 실제로 규정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지식이 그 힘을 지탱하는가?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능력주의의 신화를 비판하는 데서는 탁월하지만, 그 대안이 약하다. 그는 시장이 인간을 어떻게 파편화하는지 잘 보았지만, 공동체 또한 인간을 어떻게 규범화하고 포획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그러나 푸코 이후의 문제는 공동체가 좋은가 개인이 좋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이름으로든 인간을 하나의 규범, 하나의 정상성, 하나의 선의 모델 속에 고정하려는 시도 자체를 경계하는 데 있다. 공동체가 선한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인간의 낙원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결국 공정하다는 착각이 내게 남긴 가장 중요한 통찰은 두 가지다. 하나는 능력주의가 공정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자기 실패를 내면화시키는 규율 장치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공동체 또한 하나의 권력 정당화 장치라는 것이다. 공정은 시장의 평가를 더 잘 분배하는 기술로 환원될 수도 없고, 공동체의 미덕을 더 크게 외치는 선언으로 완성될 수도 없다. 누가 이러한 가치가 옳다고 규정한 걸까? 공정은 오히려 어떤 제도도, 어떤 공동체도, 어떤 시장도 인간을 최종적으로 평가하고 규정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인간은 외력 없이 자신의 행동만으로 존재를 완성시킬 수없으며, 그는 슬롯적 관계망 속에 형성된다. 그의 생각 및 모든 행위는 슬롯라는 이름의 권력이 요구하는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가족부터 의무교육으로 대변되는 초중등교육, 군대, 온라인 게임, 공동체 그 모든 곳에서 개별 주체는 규율을 내면화한 유용하고도 순종적인 주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한 인간은 동시에 그 어떤 공동체의 기준으로도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자기가 자신의 방법 대로 자신을 규율할 수도 있지 아니한가? 실제로 푸코 말년의 저작은 이러한 점으로 초점이 이동한다. 자기 기술로, 외력에 반항하여 자신을 배려하는, 슬롯가 아니라 자신의 규율로 자신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을 푸코는 고대에서 그 계보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이를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공정은 승자와 패자의 몫을 다시 조정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 인간 주체를 하나의 완결된 평가 대상으로 만들려는 모든 규범으로부터의 질서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고 테제를 반정립하려는 태도 속에 있다. 결국 모든 것은 가치 판단의 장이다. 모든 의견은 해부되어야 하며, 그리고 또한 해석되어야 한다. 니체는 현상의 기원을 보았을 때의 모순점에서 무언가의 작용, 즉 힘과 권력 그리고 이에 의해 쓰인 해석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상을 부수고 현상의미를 재배치하여 그것의 본질을 구하려 한 니체, 니체 이후 현대 철학의 가장 큰 거인, 미셸 푸코의 사상은 그의 통찰에서 권력의 계보학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능력주의와 공동체주의 이 두 이데올로기의 기원, 그리고 현재에까지 이어져 온 계보를 보자. 능력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 동기는 무엇인가? 어떤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지식들은 사용되는가? 샌델은 능력주의의 신화를 벗겨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질문, 즉 시장 그리고 공동체의 권력성까지 의심하는 일은 결국 푸코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