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으려 갈망하는 인간

주인과 노예: 왜 타인은 나를 파괴하려하는가?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다.
(L'enfer, c'est les autres.)

- 사르트르








1. 타자화에 대한 단상



타자화란 타인을 열등한 존재인 타자로 명명하여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두려는, 자기 존재 구축의 한 비열한 전략이다. 타자화는 대상화와 상당히 가까운데 대상화란 인간을 물건으로 보는 태도를 일컫는다. 물건 따위로 규정해 타인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타자화의 심화라 볼 수 있다. 결국 이건 칸트의 실천이성의 원칙, 즉 의무론에 어긋나는 행위인데, 결국 그 타인을 수단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슬롯적 배제, 소외, 낙인 이 말없는 폭력은 이러한 요인들을 통해 정당화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주인이 되려 한다. 그리고 타인을 노예로 굴종시키기 위한 인정투쟁을 무한히 반복한다. 결국 인간본성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려 하는데, 타인을 복속시키고 대상화하거나 열등한 타자로 낙인 짓는 것도 이러한 주인 되려는 자세의 기형적인 발현이라 할만하다.


작년에도 지난주에도 어제도 언제나 나를 타자화하려는 타인을 본적이 있다. 순간의 상황 속에 모든 맥락을 가두어둔 채로 나를 being-for-other, 그를 위한 나로 규정지었다. 그는 나를 열등한 존재로 규정을 짓고 타자화해 자기를 위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기형적인 주인-노예 도식을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에 따르면 끝없이 주인이 되려 하는 노예의 열등감에 기반한 인정의 갈구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어진 일부 측면들이 모여 근대의 세상은 이성적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하지만 칸트의 인간 존엄 원칙을 위반한 경우의 기형적인 도식으로 그것이 성립되어 버린다면, 그게 과연 이성적 나아감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헤겔이 말한 진정한 자유의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헤겔은 자유란 본능이나 주변환경에 얽매이지 않은 순수한 이성에서 비롯된 행위만이 진정 그자신의 자유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보았다. 즉, 비열한 자기상승 본능이 변증의 전제가 된다면 그 명제는 불성립할 것이다.





전체는 거짓이다.

- 아도르노




아도르노는 이러한 기형적 변증법이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을 낳았다고 보았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순행하기보다도 그러한 존재들은 주로 역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한가지 좋은 측면 만을 보여주며 시민들을 선동하였다. 자신은 이미 모든 테제와 안티테제를 지양하였으며 유한차원을 극복한 종합, 즉 그 모든 시대의 이상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에서 그 실상은 모순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채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바람에 더욱 퇴행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2. 타자화의 비열한 적용방법


타인들은 순간의 모습으로 당신을 재단해 그들을 위한 당신의 모습을 형성해 버린다. 그 재단의 속도는 마치 원시시대에 빠르게 판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그것과도 같다.



이건 인정투쟁의 연속선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굴복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도 상대방의 승인을 얻고자함이 이 개념이나, 결국 그 '승인'에 인간 존재는 원초적 강박을 느끼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이 승인되어짐이라는 것에 매몰된 인간은 이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한다. 가장 쉽게 이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을 영원한 타자, 심지어는 물건으로 규정지어 가십하는 것이고 또한 낙인짓는 것이다.



끝없이 인간존재는 자신의 시선에 놓인 다른 사람이란 존재를 자기보다 낮게 노예로 타자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다른 존재가 누가 봐도 높은 주인 된 존재라면? 그렇다면 한 인간은 그를 향한 끝없는 열등감을 느끼며 상승하려 하거나, 꼬투리를 잡아 그를 노예로 전락시킬 것이다. 다만 상승, 즉 위버멘쉬가 된다는 것은 결국 어려운 경지이기에 그는 결국 보통 타인을 깎아내리는 비열한 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자기와는 '다른 존재'를 낙인짓고 혐오하고 조롱하는 타자화적 본능, 하지만 생각해봐야 한다. 이러한 본능에 충실하다는 것이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그가 주로 쓰는 말에는 그 말을 쓴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그 말을 쓴 것에 심리적 기원을 찾을 수 있게 한다.



그 기원에서 어떠한 방향의 힘으로 그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미시 환경을 재배치할려는 지에 대한 의지를 볼 수 았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결핍된 부분을 사용하여, 타인을 규정하려 하는 것이다. 그 자신의 가장 노예적인 부분으로 타인을 재단하여 그 타인을 그 부분의 아래로 두는 무의식적인 행위를 볼 수 있다. 즉 비열한 자기 상승 욕구인 것이다. 초극의 노력 없이도 너무나 쉽게 그는 타인을 노예로 규정지어 자기 존재 인정 승인의 목적에 도달하고야 만다.



그에게 왜 다름이 거슬림으로 이어지는가? 왜 그가 그 말을 사용해서 그 다름을 열등으로 규정지었는가? 이러한 것이 상당한 원시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다원적 가치들이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 왔다. 문명의 이기는 다름에서 피어져 왔다. 멘델은 기존의 학설과 다른 의견을 내세웠고 나중에야 그 유전적 사실은 진실이 되었다. 억제됨은 고임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상기해야 만한다. 고이면 썩게 된다. 자 여기에 온갖 규정과 정치질 그리고 이를 통해 미시적 권력을 가진자가 있다. 우리 곁에 있다. 오늘도 나는 보았고, 여러분들도 오늘 보았다.



어떤 공간에서 말할 권리는 나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가?
고여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