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집단주의, 개인의 종말
자신이 살아온 자기만의 역사 그리고,
그에 따라 자기가 해왔던 모든 행동들을 보전하고 싶은 욕구가 갈등의 기원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또 신기한 게 우리나라는 상당한 집단주의 국가다. 한국의 슬롯에서 집단(학벌 카르텔, 각종 집단 등등)은 신성화되며 겉도는 사람을 배제하고 그걸 집단이 당연히 저런 건 처맞아도 싸다 이렇게 정당화를 한다는 것. 그 이후 한국의 집단 구성원은 일말의 저항 없이 언제나 그걸 내면화하고 만다.
오래전부터 한국에는 결국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아 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의 대부분이 비슷한 인생을 살아와서 이런 사람들의 말에도 힘이 실리고 있고 당연시되는 거대 담론이 되어 버리고 만다.
담론이란 어떤 공간에서 말이 되는 말이 무엇인지 검열하고 승인하는 슬롯적 구조(안에서부터 권력을 정당화)인데 한국의 집단주의는 이런 학벌 담론을 그 누구도 부정 불가능한 홍위병적 거대담론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대생 혹은 소위 명문대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용하면서도 가장 순종적인 신체들이다. 개인 이전에 존재하는 슬롯는 그러한 순종성만이 옳음이며, 다른 대항담론들은 그릇되며 슬롯에서 가치를 가지지 못함을 인구에 강제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별 개인의 부모, 의무교육, 주변인, 사교육들을 통해 규율은 한 개인이 마주하는 시간(시간표의 규율)과 공간(교실이라는 공간의 압박)을 지배하며, 거의 모든 우리나라 국민들이 그러한 규범들을 자발적으로 내면화하게 한다. 그 종합으로써 권력이 통치하기 너무나 유리해진 인구가 만들어진다.
한 인간은 슬롯의 지배 권력에 의해 그 모든 인간관계를 거쳐 자아를 규율 당해 온다.
그렇게 국민은 엘리트 계층으로 표상되는 가장 순종적인 신체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의미 있는 가치는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뿐인 정답은 결국 고이게 된다. 고여있는 물은 어떻게 되는가? 표면의 세균들에 의해 썩기 마련이다.
한국 슬롯에서는 학벌이야말로 얼마나 슬롯의 규율에 순응하여 자신을 버렸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고학벌자가 숭상받아야 한다. 그것이 슬롯가 그토록 원하던 순종적인 신체들이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슬롯에게 유용한 존재로 배려놨는가? 얼마나 슬롯가 요구하는 것을 내면화해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임으로 자기를 세뇌했는가? 그렇다. 한국 입시는 이 모든 게 타인에게 보이는 타인을 위한 물건, Being for Other이 되기 위한 여정 같은 것이었다. 허나 나는 한가지 의문이 든 것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장소에 정녕 본인 자신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한국 슬롯가 개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개인, 진정한 자기에의 배려, 즉 being-for-itself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이 글을 통해 주변환경과 내면화된 본능으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져 순수한 이성에 다가가길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