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한 우리 집 강아지 호박이는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원래 강아지들은 표정이 없는 건가? 하지만 호박이는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 사람만 보면 달려가서 꼬리를 마구 흔든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꼬리를 흔들지는 않는다. 처음 본 사람에게는 왈왈 짖으며 경계를 하지만, 한번 본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도 절대 짖지 않는다. 진돗개의 유전자를 가져서인지 매우 영리하고 민첩하다.
호박이는 2년 전 겨울, 전라도 익산에 있는 유기견 센터에서 입양하였다. 호박이 어미 개는 유기견으로 떠돌다가 구조되어 유기견 센터에서 7마리의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그중 한 마리를 우리가 입양한 것이다.
“호박”이라는 이름은 손자가 지은 것인데, 이제 우리 가족이 되었으니 자기 동생이라며 자신의 태명인 수박이의 이름을 따서 호박이라고 지어 주었다.
생후 2개월 만에 어미 품을 떠나 우리에게로 온 호박이는, 강아지가 아니라 마치 귀여운 아기 곰 같았다. 콩콩 튀는 명랑함으로 온갖 재롱을 부리다가도, 새벽이 되면 어미가 그리운지 낑낑거리며 어미를 찾는 듯하였다. 어미를 떼어놓은 안쓰러운 마음에 수건으로 폭 싸서 가슴에 안고 마치 어린 아기를 재우 듯 방을 왔다 갔다 하면, 내 품에 쏙 안겨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이렇게 귀여웠던 호박이가 쑥쑥 자라더니 금방 아기티를 벗었다. 호박이가 4개월이 되었을 즈음 견생 첫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다.
이웃집에는 아주 사나운 진돗개 진돌이가 있는데, 천방지축 어린 호박이는 무서워하지도 않고 틈만 나면 이웃집으로 달려가 진돌이 앞에서 꼬리를 흔들어댔다. 행여 진돌이에게 물릴까 봐 가지 못하게 막기도 하고, 어쩌다 진돌이 목줄이라도 풀리면 놀라서 호박이를 안고 들어왔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은 진돌이네 집에서 커피타임이 있었다. 호박이는 쫄랑쫄랑 할아버지를 따라 진돌이네 집으로 먼저 갔고, 나는 집안일이 남아서 마무리를 하고 뒤쫓아 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디선가 강아지 낑낑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어, 어디서 강아지 소리가 나지? 호박이는 할아버지를 따라 진돌이네 집으로 갔는데... 혹시 우리 호박이 소리인가?' 하며 데크로 나와 "호박아, 호박아~" 하며 작은 소리로 불러 보았다.
그때 자동차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호박이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호박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더러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타난게 아닌가.
호박이는 나를 보자마자 설움에 복받쳐 더 큰 소리로 낑낑 울며 내게로 다가왔다. (마치, 할머니 저기 저 애가 나를 때렸어. 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깜짝 놀라 호박이에게 다가갔다.
“호박아!! 날도 추운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오구, 우리 강아지를 누가 그랬어?” 하며 우는 호박이를 급히 수돗가로 데리고 갔다. 호박이는 여전히 낑낑 울면서 따라왔다. 더운물을 데울 새도 없어 찬물로 대충 씻어 주고 커다란 타올로 감싸주었다.
그때 남편과 옆집 아저씨가 허겁지겁 쫓아와서 호박이를 살펴보았다. 두 남자들도 정신이 없는지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못하고 호박이만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다. 다행히 상처는 없다고 했다.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때라 얼른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수건으로 덮어주고 따뜻하게 히터를 틀어주었다. 호박이는 많이 놀랐는지 내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찬물로 씻겼지만,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까 걱정이 되었다. 호박이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았다.
일이 벌어진 상황은 이러했다.
세 집이 모여 커피를 마시는데, 세 마리의 강아지 (진돌이, 장군이, 호박이. 우리 호박이가 제일 막내다.)가 사이좋게 놀더란다. 그런데 장군이네 아저씨가 서열 1위 진돌이에게 간식을 주었다. 간식을 골고루 주지 않고 진돌이에게만 간식을 주자, 진돌이가 제 간식을 지키려고 했는지, 옆에서 놀고 있는 우리 호박이에게 갑자기 으르렁 거리며 달려들었다고 한다.
호박이는 저를 물려고 달려드는 사나운 진돌이를 피하다가, 진흙탕물에 고꾸라진 것이란다. (진돌이가 목줄을 하고 있었지만, 기세가 너무 사나워 다들 긴장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물리지는 않았지만 추운 날 웅덩이에 빠지고, 사나운 진돌이의 공격에 어린 호박이가 얼마나 놀랬을까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이를 데리고 갔으면 아이를 잘 봐야지, 할아버지는 아이가 이지경이 되도록 뭐 한 거야?!!”
난 화가 나서 애꿎은 남편에게 큰 소리를 냈다. 남편도 속이 상했는지 저놈이 괜히 가만히 있는 우리 호박이를 공격했다며 진돌이를 미워했다.
그러면서, 호박이가 진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집으로 도망을 가면서도 "앙!" 하고 서슬 퍼런 진돌이에게 반항을 했다며, 호박이의 담력이 대단하다면서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이튿날, 평소 같으면 휙휙 공중을 날아다녔을 호박이가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제 일로 강아지가 놀라서 아픈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계속 살펴보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잘 먹지도 않고 꼬리도 흔들지도 않았다. 서둘러 남편과 함께 호박이를 데리고 읍내 동물 병원에 갔다.
어제 일을 얘기하고 살펴봐 달라고 하였다. 수의사는 강아지가 놀라서 열이 심하다고 주사를 놓아주며, 다행히 감기는 들지 않았다고 했다. 금방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안심이 되었지만, 하루 종일 호박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다행히 호박이는 하루가 지나고 나니 괜찮아졌다. 밥도 잘 먹고, 여전히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만 보면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 대고, 데크 위를 한 번에 휘익 날아오른다. 예전의 명랑, 쾌활한 호박이로 돌아왔다. 잘 놀고 있는 호박이를 보니 안심이 되면서 어제의 일이 자꾸 떠올랐다.
진흙탕물에 빠져 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도망 온 호박이가, 나를 보자마자 응석을 부리며 더 크게 울던 모습이 꼭 손자 같아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서 호박이가 의지하고 믿는 사람이 나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더 애틋하고 안쓰러웠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호박이의 견생에 첫 번째 시련은 이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두 번째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 아. 호박아 너무 미안해……
(두 번째 사건은, 다음 수요일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