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아직 해피엔딩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만,

나란히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by봄날의 곰

친정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오자 맥이 탁 풀렸다.


아이들은 집 안에 도착하자마자 목줄 풀린 강아지마냥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신이 났다. 나는 차에 실린 짐 중 오늘 당장 필요한 몇 가지만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결혼 전 내가 쓰던 익숙한 방에 들어서서 비로소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후…… 길게 내뱉은 숨을 따라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풀렸다.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몸이 이완되다 못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정말 격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나는 ‘에구에구~’ 앓는 소리를 내며 캐리어 속을 뒤적거려 아이들 갈아입을 옷가지 몇 개만 겨우 꺼내놓고는 도로 냅다 방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혼자 그러고 누워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어쨌든 도착했으니까.

그래, 한국에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다음 날의 나에게 미루기로 했다.

비행기 안에서 흘린 땀과 눈물로 꼬질꼬질해진 아이들과 대충 씻고 나와보니 거실에 놓여진 상 위에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무사 귀국 축하연'이었다.


“우리 잔치해?”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상 위를 둘러보다 얼른 젓가락으로 시금치나물을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 눈이 커졌다.

‘그래, 이 맛이야!’

한 번씩 비슷한 재료를 써서 나도 만들어 보는데, 왜 내가 만들면 이런 맛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재료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손맛과 경력의 차이인가. 원조와 짝퉁의 차이는 결국 이런 데서 판가름나는 건가 싶었다.


이후 며칠 동안, 자타공인 우리 집 공식 ‘장금이’인 친정엄마는 그토록 그리웠던 한식을 끼니마다 배부르게 차려주셨다. 러시아에서 그놈의 김치찌개를 못 먹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어왔는지, 나는 입덧하는 임산부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찌개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싹싹 비워냈다.


졸지에 먹을 입이 넷이나 불어난 탓에 엄마는 며칠이고 부엌에서 나오실 틈도 없었다. 매일 식탁에는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조물조물 고소하게 무친 갖가지 나물반찬들이 빠지지 않고 올라왔다. 모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나물무침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아 귀국 전부터 나물 타령을 해댔는데, 엄마는 그것까지 잊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상 앞에 앉자마자 체면불구하고 “우와~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를 유치원생들처럼 입을 모아 외쳤다. 신이 난채로 포크와 젓가락을 들고 음식에 달려드는 우리를 보며, 엄마는 연신 혀를 차셨다.


“얘네들이 어디서 굶다 왔나....”


중얼거리는 말은 타박에 가까웠지만, 정작 옆에 앉은 엄마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반찬을 연신 날라다 주는가 하면 두툼하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조기 살을 발라 아이들 밥그릇에 번갈아 올려주느라 분주하셨다.

모스크바에서 큰맘 먹고 연어를 몇 번 사 먹은 적은 있지만, 다른 싱싱한 해산물은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이 워낙 비싸 거의 식탁에 올리지 못했다. 아이들도 전설의 밥도둑, 짭조름한 조기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번갈아 가며 번쩍번쩍 손을 들고 더 달라고 성화였다. 둘다 밥풀을 입가에 듬성듬성 묻히고 어찌나 열성적으로 먹어대는지, 이 정도 상황이면 내가 모스크바에서 몰래 애들을 굶기고 살았다는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싶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엄마가 차려주는 매끼를 싹싹 비우고 결혼 전 쓰던 방에서 며칠을 누려보았다. 잠시 주부라는 중바카라을 내려놓고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 기분은 솔직히 말해 참 좋았다. 내가 생각해도 좀 철딱서니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뜻 빈 말로도 엄마는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피곤해 보인다며 한 번씩 슬쩍 건네는 내 걱정에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그렇지만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얹혀있다 못해 며칠 새 확 홀쭉해져 있었다.



결국 미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방문 손잡이를 잡는데, 뒤통수에 대고 기어이 엄마의 한마디가 날아왔다. 자식 키워 결혼시키면 다 끝난 줄 알았더니, 하나를 보내놓았더니 셋을 더 달고 돌아왔다고.

나는 입을 삐죽 내밀다 이내 '엄마, 미안.' 조용히 속으로만 사과했다.






사실 귀국을 앞둔 얼마간은 밤마다 여러 가지 걱정이 떠올라 눈을 감아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뉴스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상황이 매일같이 업데이트됐고, 아무리 애를 써도 줄어들지 않는 짐을 보고 있으면 속이 탔다. 이러다 가는 날까지 다 정리하지 못하고 몸만 빠져나가야 하는 건가 싶었다.



새벽녘 간간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을 어르느라 설핏 잠에서 깨면,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는 경우도 많았다. 안아서 달래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다시 눕혀 도닥이는 과정에서 아이는 금세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었지만, 정작 나는 그때부터 잠이 달아나 버렸다.

그러면 이내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확인하거나, 부엌을 돌며 정리할 물건을 찾아 뒤적거리곤 했다. 한국의 상황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처음 맞닥뜨린 팬데믹과의 조우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낮에는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느라 근근이 커피를 마셔가며 버텼고, 그렇게 눈은 늘 붉게 충혈된 채 피곤에 절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친정에 머물면서부터는 달랐다.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저녁만 먹으면 그렇게 잠이 쏟아졌다. 밤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누워 베개에 머리만 대도 어느새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긴장이 풀리고 나서야 그동안 내 몸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새벽녘 내가 한 번씩 이를 간다는 새로운 사실까지 넌지시 알려주셨다.

이쯤 되면 눈치 봐서 슬슬 갈 만도 했지만, 내 코가 석 자라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다.

‘미안해, 엄마…….’

이러나저러나 떠나보니 집만 한 곳이 없었다.



아이들도 오로지 우리 네 명만 단출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조건 없는 애정을 듬뿍 받으며 행복해했다. 때가 되면 맛있는 밥이 차려지니 오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 겉으로는 누구 하나 우리가 언제쯤 ‘진짜 우리 집’으로 돌아갈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물론 양심은 있어서 내 마음 한구석에는 늘 집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겨울 내내 보일러는 괜찮으려나. 어서 가봐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아이들 끼니를 챙기는 일과 내 몸이 좀 더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선뜻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조금만 더, 하루만 더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며칠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렇게 며칠 푹 자고 제대로 밥을 먹으니 헛헛했던 속이 채워지고, 여기저기 흠씬 얻어맞기라도 한 듯 쑤셔대던 몸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다.






일단 선발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오랫동안 난방을 하지 않았던 집을 점검하고 청소하기 위해 아이들을 친정에 맡겨두고 남편과 먼저 집으로 향했다. 6개월 넘게 비어 있던 집의 문을 열자, 오랫동안 환기되지 않은 묵은 텁텁한 공기가 먼저 우리를 맞았다. 결혼 이후 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줄곧 살아왔던 공간인데도, 그 몇 달간의 부재 때문인지 묘하게 낯설었다.

우리집인데 고작, 그 사이 어색해졌다니.


원래도 아담했던 집은 네 식구의 가방과 짐이 순식간에 들어차면서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줄줄이 늘어선 캐리어에 현관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을 지경이라, 일단 작은방 하나를 짐 보관용으로 쓰기로 했다. 모스크바에서 무작정 들고 온 탓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물건도 많아 버릴 것과 분류할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트렁크에서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옷가지들은 동묘시장 곳곳에 널브러진 도매 옷 더미를 방불케 했다.

일단 방한쪽에 가방들을 모조리 집어넣고, 침구부터 정리하며 청소기로 먼지를 걷어내는 것으로 대강의 입주 준비를 마쳤다.


역시 사람 사는 일이란, 모든 준비를 끝낸 뒤에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이들까지 데려오자, 그나마 약간의 정돈으로 봐줄 만했던 집은 순식간에 본격적인 난장판으로 뒤바뀌었다. 바로 직전에 머물렀던 모스크바 숙소가 층고도 높고 면적도 꽤 넓었던 탓인지, 착시 효과까지 더해져 집이 유난히 더 비좁게 느껴졌다.


복닥!! 복닥!! 아, 좁다 좁아!!!!!!


남편은 시차 적응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나는 나대로 코로나19 여파로 외출이 제한된 상황이라 하루 종일 아이들과 집에서 지냈다.

말이 지냈다지, 그냥 우리끼리 집 안에서 생존하고 있는 거였다.

어디 콧바람 한번 쐬지 못한 채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집 안에서 지지고 볶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낮잠 한번 재우려 해도 이 녀석 한 번, 저 녀석 한 번 장난치다 걸려서 혼나고 울고, 달래기를 반복하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결국, 나는 살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현실과 타협했다.


모스크바로 향하며 최대한 미디어 노출만은 줄여봐야겠다 싶었다. 아이의 우상이었던 뽀로로와도 하얀 거짓말까지 해가며 생이별을 시켰었다. 타국의 새로운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그토록 질긴 영상 매체와의 안녕을 고했건만, 말짱 도루묵이었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 TV 시청 시간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평소라면 리모컨을 아예 숨겨두거나 다른 보드게임을 슬쩍 들이밀었을 텐데, 이제는 말릴 힘조차 없었다.

아니, 어떤 때는 영상이 있어 나를 살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건설적인 교육관을 실천하기에는 내게 남은 기력이 없었다. 엄마로서 죄바카라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때는 나도 일단 살고 봐야 했다.


돌아서면 밥시간이었고, 밥을 먹고 나면 간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엉덩이 한번 붙일 틈을 안 주는구나....

‘그래, 크려고 그러나 보다…….’

싶다가도, 명절날 종갓집 며느리도 아닌데 밥하고 설거지하다 보면 종일 싱크대 앞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잘 먹기만 하면 다행인데, 바닥에 음식을 흘리고 주스를 쏟고, 꼭 그 타이밍에 누군가는 그걸 밟고 지나갔다. 대환장 파티가 따로 없었다.


잠잠하다 싶으면 둘이 장난감 소유권을 두고 소리를 지르며 싸워댔다. 나이는 어려도 형제끼리 싸울 때는 가르마를 잘 타줘야 했다. 어설프게 넘어가려다가는 반드시 뒤탈이 생겼다. 집 안은 하루 종일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고성으로 가득했고, 종국에는 귀가 먹먹한 걸 넘어 골이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하루를 그저 무사히 버티는 것, 그것이 당시 나의 가장 큰 목표였다.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위태롭게 쌓아둔 짐을 하나씩 꺼내며 집 안 탐험을 시작했다. 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아이를 말리러 쫓아다녔고, 작은 녀석은 걷지도 못하면서 가공할 만한 배밀이 실력으로 장판 위를 헤엄쳐 다녔다.


“야!!!! 그만해!! 쫌!!”

이따금씩 참다 참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나의 우렁찬 사자후가 집 안을 쩌렁쩌렁 울려도, 아이들은 그때만 잠시 움찔할 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유분방하게 집을 점점 더 어질러놓았다.

나는 화냈다가, 슬퍼했다가, 이내 포기했다. 숫제 미친 여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모스크바에 있을 때가 더 나았던 건가?'


애들이 뭐 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한 엄마의 시선 (손가락으로 가죽소파에 구멍을 넓히는 형과 이를 구경하는 동생)


다행히 모두에게 이 상황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큰아이는 그 거듭되는 탐험 끝에 집안 어딘가 방치되어 있던 옛 장난감들과 재회한 기쁨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래, 너라도 행복하면 됐다.....

정말이지 복직 전까지 차근차근 집을 정리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정리는커녕 집 안은 이미 대여섯 번은 도둑이 들었다 간 집처럼 점점 더 어질러지고 있었다. 아이들과 매일 집에 붙어 지내다 보니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치우는 속도가 어지르는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지 못했다.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어 어린이집 입소일을 복직 직전까지 최대한 미뤄둔 탓이었다.


귀국 후 복직 전까지의 집 안에서의 석 달은 말 그대로 ‘파괴와 재건’의 반복이었다.

두 에너자이저를 감당하려면 바깥놀이 만한 게 없건만, 집 앞 놀이터와 공원에는 흉한 노란색 테이프로 출입 금지 띠가 둘러져 있었고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 누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의미 없이 스치는 타인의 가벼운 접촉에도 눈치를 살피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차근차근 흘렀고, 멀게만 느껴졌던 나의 출근일도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들도 집 근처 새로운 어린이집에서 다시 단체 생활을 시작했다.

초반 일주일 동안 그새 한국어를 많이 잊은 큰아이를 걱정했건만 의외로 나름 ‘경력자’ 답게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의외로 작은아이가 새로운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 위해 타는 유모차부터 싫어했고, 낮잠 시간만 되면 앙칼진 울음으로 불편함을 온몸으로 호소했다. 결국 나는 담임 선생님의 요청으로 한동안 어린이집 현관 근처에서 ‘죄인 모드 5분 대기조’가 되어야 했다.


집에서 저녁 반찬을 만들다 전화를 받고 급히 뛰어나오느라, 소스가 튄 늘어진 티셔츠도 갈아입지 못한 채 인터폰을 누르고 현관 앞을 서성였다.

따스한 한낮의 햇살 아래 우두커니 서 있다 문득, 참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모스크바에서 귀국하기 전에는 꽤 많은 계획을 세웠었다. 운동도 하고, 치과도 가고, 무릎 검사도 받고, 체중도 줄이면서 남은 육아휴직 기간에는 하루 한두 시간쯤 나를 위한, 오롯이 정신건강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처럼 내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향해있었다.


11kg이 넘는 작은아이를 수개월 동안 매일 아기띠로 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르바트 거리를 가로지르며 파워워킹을 선보인 대가는 족저근막염과 하지정맥류라는 진단으로 돌아왔다. 결국 약물복용와 물리치료를 거쳐 수술까지 받고서야,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악소리가 절로 나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뭐, 원래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상황이 이랬는데도 모스크바에서 보낸 그 시간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상하게도 망설임 없이 '아니오'라고 말할 것 같다. 후회는커녕 오히려 그 시간이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지금도 가끔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때의 시간들이 불쑥 되살아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특별했던 사건보다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먼저 떠오른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실내복 위에 두툼한 외투를 껴입은 채 아이들과 함께 걷던 아르바트 거리. 분유를 먹으며 아빠 품에 안겨 오물오물 움직이던 작은아이의 귀여운 입술. 우리가 좋아했던 폴 베이커리의 애플파이를 사 들고 향긋한 버터향을 맡으며 들뜬 마음으로 돌아오던 길. 길고 좁은 부엌 앞 복도에서 미니카를 굴리며 환호하던 큰 아이의 웃음소리. 라디에이터 앞에서 보송하게 마르던 빨래와 그곳에서 은은하게 풍기던 섬유유연제 향기. 한 번씩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잘 마른 빨랫감에 얼굴을 묻고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면 내 마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차분해지곤 했다.


하원 길 오후 다섯 시, 집에 들어오기전 스몰렌스까야 역 앞에서 올려다보던 파랑과 보라, 붉은빛이 물감처럼 번지던 하늘.

돌이켜보면 우리를 지탱해 준 것은 거창한 사건이나 특별한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소소하고 평범한 하루의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

낯선 동양인 아이를 애정으로 품어주었던 유치원 선생님들, 바쁜 회사 생활 중에도 나와 아이들을 살뜰히 챙겨주려 했던 남편의 온라인 게임 동료들, 나의 소중한 숨구멍이 되어주었던 모스크바 육아 동지들, 종종 러시아 음식을 만들어 나눠주던 바로 옆방의 우즈베키스탄 출신 여대생, 나의 우렁각시 카티야.

온라인 단체 채팅방에서 모스크바 생활과 육아에 관한 조언과 정보를 아낌없이 나눠주었던 많은 한인 교민분들, 대중교통이나 길 위에서 돌발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선뜻 도움을 건네주었던 이름 모를 모스크바 시민들까지.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곳에서 무사히,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서 이렇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물론 돌아보면 비용과 효율, 그리고 안정이라는 기준으로 따져봤을 때, 나 혼자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 혼자 다녀오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늘 함께하려 했다. 장을 보려고 아이 둘을 데리고 나섰다가 예상치 못한 폭우 속에서 택시를 잡느라 애를 먹기도 했고, 가끔은 남편과 밖에서 그날 겪은 부당한 일을 안주 삼아 맥주 캔을 들이켜며 함께 열띤 어조로 흉을 봐주기도 했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를 시간을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한 발자국씩 함께 건너갔다.때로는 번거롭고 만사가 힘에 부치는 날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어 스스로가 한심하고 헛웃음이 나오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함께 겪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 한 뼘쯤 떨어진 평행선을 그리며 각자의 자리에서 앞으로만 나아갔을 것이다.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남겨두고.





그래서.... 그 뒤는 좀 어땠냐고?


동화 속 주인공들은 한바탕 고된 여정을 끝내고 나면 행복한 결말과 함께 오래오래 잘 살거나 몰라볼 정도로 환골탈태의 성장을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글쎄.


귀국 후 남편이 갑자기 가정적인 사람으로 개과천선한 건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 말이 있듯, 오히려 지금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다만 본인은 나름대로 조심한다는데, 가끔 예고 없이 벌어지는 소소한 급발진은 여전히 내 뒷목을 잡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도 사소한 일로 투닥거리고 언성을 높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화해하곤 한다.



다만 그 반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이제는 무슨 일이 터져도 막막함에 쉽게 잠식당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다. 어쩔 수 없이 가슴은 철렁 내려앉지만, 그래도 옆에 있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떻게든 되겠지, 뭐." 하고 넘길 수 있는 배짱도 생겨났다.



큰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몫을 해내며 견뎌낸 시간이었다. 그런데 훗날 돌아보니, 그 팍팍했던 날들은 어느새 우리의 반짝이는 한 시절이 되어 있었다. 어릴 적 강가에서 주워 와 보물처럼 품고 다니던 맨질맨질한 돌멩이 하나처럼. 남들 눈에는 의미 없고 흔해 빠진 돌에 불과할지 몰라도, 우리 가족의 마음 한구석에는 평생 닳지 않은 채 제자리에 남아 희미하게 빛나는 그런 시간 말이다.


그때 대바카라 없이 뭉쳐 있던 우리가 그립고, 모든 게 서툴렀던 그 시절의 나도 괜히 조금은 그립다. 그곳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먼지처럼 흩어져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우리 삶의 틈새마다 알알이 박혀 있다가, 잊고 지낼 때쯤 불쑥 반짝이며 말을 건넨다.


괜찮다고, 원래 삶이란 다 그런 거라고.


우리가 마주할 현실도 기대만큼 근사하지 않은 날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흔들리고, 때로는 서로 다른 속도로 걷다가 잠시 거리를 두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그래도 결국 우리는 다시 서로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조금 늦으면 어떤가, 좀 비틀거리면 또 어떤가. 다시 슬그머니 서로의 손을 찾아 잡고, 툴툴대며 나란히 걸음을 옮기면 된다.아마 그것이 앞으로 살아갈 우리만의 방식이라고 믿으며…


어떤 길이 펼쳐져 있든, 우린 그 길 위에서 끝내 함께할 테니까.



겨울의 어느 날, 모스크바 시내 거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