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물 베기라더니, 잘못하면 물도 베이고 마음도 베인다
문화교실에서 '부부생활' 강연을 마치고 다과회가 열렸다.
한 중년 부인이 다가와 슬그머니 물었다.
"교수님은 부부싸움 안 하시죠?"
나는 웃으며 답했다.
"가끔 싸웁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충돌하고,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싸우기도 합니다."
"설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남편이 앉은자리로 돌아가는 부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부부가 싸우지 않는 것이 행복일까?
중요한 것은 '싸움의 유무'가 아니라 '말의 방향'이다. 같은 불만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말은 관계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될 수도,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존 가트맨과 줄리 슈워츠 가트맨의 『행복한 커플은 어떻게 싸우는가』(Fight Right: How Happy Couples Turn Conflict into Connection)를 추천한다. 한국어판은 2024년 12월 해냄에서 출간됐다.
부부싸움 때문에 고민이 깊은 분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바카라이다.
나는 이 바카라을 종종 ‘부부싸움 안내서’라고 소개한다. 부부가 싸우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 이왕 싸울 거라면 조금 덜 다치고, 조금 덜 후회하고, 가능하면 싸움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카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대로 한 판 싸우려면 나름의 '싸움의 법칙'에 따르면 재미(?) 있지 않나.
그래서 이 바카라에서 말하는 방식대로 싸운다면 적어도 서로의 경계선을 무작정 침범하지는 않는다. 비무장지대쯤 되는 곳에 서서 “여기까지는 내가 양보할 수 있고, 여기까지는 당신이 양보할 수 있겠구나” 하며 타협점을 찾게 된다.
그런데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라면 이 바카라을 꼭 읽어보시라. 오히려 그런 분들에게 더 권하고 싶다. 부부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알려주는 바카라은 아니지만, 계속 이기려고 하다가는 결국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아주 잘 알려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냥 둥글둥글하게 살지 뭐. 어화둥둥 내 사랑, 당신이 옳소, 내가 옳소 할 것 없이 적당히 넘어가면 되지” 하는 분이라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지금처럼 평화롭게 사시면 된다.
다만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약이 될 때가 있다. 평소에는 써먹지 않더라도, 언젠가 한 번 크게 부딪혔을 때 “아, 그때 그 바카라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지” 하고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법 쓸모가 있다. 그래서 이 바카라의 핵심만큼은 미리 알아두기로 하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잘못 휘두르면 물도 베이고 마음도 베인다. 싸우지 않는 법보다, 싸우면서도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 법을 알아두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내 경험을 설명하라
"당신은 왜 늘 그래?"라며 비난하는 대신 "나는 이번 일로 많이 서운했어"라고 말한다.
"당신은 원래 이기적이야"라고 인격을 규정하는 대신 "그 행동 때문에 내가 혼자라고 느꼈어"라고 내 경험을 전달한다.
상대를 판단하는 영역에서 나를 설명하는 영역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당신 때문에 화났어"라는 바카라임 전가 대신 "나 지금 화가 나 있어"라고 솔직해지자.
비난은 방어 벽을 치게 만들지만, 감정의 설명은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라
싸움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상대의 인격을 건드리는 말이다.
"그것도 못 해?", "정말 한심하다", "당신이 그렇지 뭐."
이러한 말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상대를 낮추려는 모욕일 뿐이다.
행동은 고칠 수 있지만, 인격에 남은 모욕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는다.
사람을 쳐내지 말고 문제만 테이블 위에 올려놓도록 한다.
판결문이 아니라 이해를 구하라
"내가 맞잖아", "봐, 당신도 인정했지?"
논쟁에서의 승리는 관계에서의 패배를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에 필요한 것은 법원의 판결문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다.
그렇다고 무조건 상대에게 동의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은 다르다.
"당신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지만,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알 것 같아."
이 한마디는 나의 생각을 지키면서도 상대의 감정을 인정해 준다.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한쪽의 굴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다.
'관계의 절단'이 아닌 '살아있는 멈춤'을 택하라
감정이 격해질 때 "됐어, 당신하고 무슨 말을 해"라며 문을 닫아걸어 잠그는 침묵은 관계의 절단이다. 반면 "지금은 너무 흥분했으니 조금 진정한 뒤 다시 얘기하자"는 침묵은 관계를 지키기 위한 정지 버튼이다.
멈춤의 형태는 같아도 그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싸움이 과열될 때 던지는 작은 수습의 신호도 중요하다.
"잠깐,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어", "공격하려던 게 아니야, 다시 말해볼게."
이 짧은 말들이 싸움의 폭주를 막아선다.
그렇다면 부부는 왜 같은 문제로 끊임없이 다시 싸울까?
가트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부부 갈등의 69%는 애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성격, 가치관,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차이이기 때문이다.
계획파와 즉흥파, 저축파와 소비파의 차이는 성격을 뜯어고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 차이의 뿌리에는 각자가 평생 품어온 삶의 소망과 정체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그 방식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녀온 삶의 뼈대 하나를 내놓으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번에 끝장을 보자"는 태도로 덤벼들면 대화는 교착 상태에 빠지고 결국 서로 지쳐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어차피 없앨 수 없는 문제라면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
부부싸움의 목적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도 계속 함께 있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제 부부싸움의 마지막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누가 맞았어?"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어?"라고 물어야 한다.
"문제가 해결됐어?"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 연결되었어?"라고 물어야 한다.
좋은 부부는
안 싸우는 부부가 아니다.
싸우면서도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 부부다.
상대를 이기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말하고,
상처를 돌려주려 하지 않고
감정을 설명하려 말한다.
"당신이 문제야"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 문제가 있어"라고 말한다.
결국 좋은 싸움이란
상대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놓인 문제와 함께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싸움 끝에서
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다시
서로의 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