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스며들다.

by글라라



별이가 퇴원한 뒤로 은정은 해나와 별이가 잘 지내는지,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는지 자주 궁금 해졌다. 언제부터 시작된 마음인지는 은정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퇴근길이면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반지하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길과 미리 연락해 아이들만 있는 시간을 확인한 뒤 잠시 들르는 날도 조금씩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해나와 별이는 한참을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은정을 반겼다.

은정은 아이들이 자신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 마음이 불쌍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연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웃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필요할 때 곁을 지켜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밥은 먹었고?”

은정이 연거푸 묻자 별이는 기다렸다는 듯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는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언니와 무슨 놀이를 했는지 이야기하며 은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러다 여름이 오면 함께 수영장에 가자고 말을 하면서 은정과 같이 물놀이를 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며 두 팔을 휘저어 헤엄치는 시늉까지 했다. 아직 수영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별이의 표정은 벌써 시원한 물속에 뛰어든 아이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별이를 보면서 은정도 마트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을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날의 최악의 손님 이야기를 하며 함께 흉을 보기도 하고, 최고의 손님 이야기를 하면서 때론 별이의 엉뚱한 대답에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말수가 적은 해나도 곁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가끔 웃음을 보탰다. 그렇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은정은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가 보낸 하루의 시간을 나누며, 은정 역시 오랫동안 잊고 있던 편안함을 되찾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골목에 내려앉을 무렵이면 한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은정은 한길의 귀가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이들이 아쉬운 얼굴로 다음에 또 오라고 조르면 은정은 정확한 날짜를 정해주기보다 조만간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은정은 해나와 별이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동시에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자신도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었다. 한길은 은정이 돌아가는 시간이면 집이 보이는 골목 어귀까지 배웅하곤 했다. 그 짧은 길을 걷는 동안 은정은 아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별이가 여름에 함께 수영장에 가자고 조른 일과, 말없이 듣고 있던 해나가 가끔 웃음을 터뜨린 일도 이야기했다.

한길은 은정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도 그 시간 속에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단순한 고마움인지, 새로운 사람을 향한 호감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수록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따라왔다. 미영을 잃은 뒤 한길에게 새로운 인연은 새로운 이별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진다는 회자정리의 말처럼, 어렵게 찾아온 이 따뜻한 시간도 어느 날 갑자기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한길은 그런 두려움을 감춘 채 은정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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