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돌아가다

by글라라

미영은 아이들의 웃음이 조금씩 늘어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늘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해나의 얼굴에도 가끔 편안한 미소가 번졌고, 별이는 은정이 오는 날이면 골목까지 뛰어나가 반겼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미영의 마음속에는 오래 잊고 있던 안도감이 조용히 차올랐다. 아이들의 변화가 은정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영은 병원에서 만난 은정에게 자신의 기억을 보여준 일이 옳았는지 여러 번 고민했다. 자신의 절박함 때문에 은정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바카라임을 떠넘긴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영의 모습은 전보다 훨씬 희미해졌다. 손끝은 햇빛에 녹아드는 안개처럼 흐려졌고, 아이들의 곁에 오래 머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힘이 자꾸만 그녀를 먼 곳으로 끌어당겼다.

미영은 아이들이 자신을 잊을까 두렵지는 않았다. 해나와 별이가 엄마를 기억하기 위해 슬픔 속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자신을 조금씩 잊는 대신 더 많이 웃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미영에게도 가장 큰 행복이었다.

미영은 문득 은정을 처음 만났던 병실을 떠올렸다. 그때 은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육체로 돌아가는 길은 거의 닫혀 있었고, 동생이 은정을 부르는 목소리만 희미한 실처럼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미영은 무엇이라도 내어주고 싶었다. 자신에게 다음 생이 남아 있다면 그것마저 은정에게 주겠다고 빌었다. 다시 태어날 기회를 잃어도 좋으니, 살아 있는 은정이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마음이 이름 모를 존재에게 닿았던 것일까.

미영의 가슴속에 고여 있던 빛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아이들을 두고 흘렸던 눈물과 떠나지 못한 미련, 끝내 전하지 못한 말들이 작은 빛의 조각으로 변해 어두운 병원 복도를 밝혔다.

그러나 미영은 은정을 되살릴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미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은정이 돌아갈 길을 잠시 밝혀주는 것뿐이었다.

빛이 이어진 길 끝에서 은정을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정은 그 목소리를 향해 스스로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씩 삶에 가까워질 때마다 멀리 놓여 있던 자신의 몸도 조금씩 선명해졌다.

은정이 마침내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동안, 미영을 이승에 붙잡아두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은 하나씩 조용히 풀려나갔다. 그리고 미영이에게도 더는 늦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암시라도 해주는 것처럼 돌아갈 곳이 향하는 문이 열려있었다.

죽음이 아이들을 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따뜻한 빛을 바라보며 미영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버리며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는 것을… 미영은 마지막으로 해나와 별이를 바라보았다.

은정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울음빛이 어려있지 않았다. 아이들 상처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상처를 함께 바라봐줄 사람이 곁에 있었다.

미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자. 내가 가야 할 곳으로. 사랑했다. 나의 딸들아. 안녕.’

그 말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건네는 마지막 위로였다.

미영은 문 너머의 빛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새벽안개처럼 조금씩 옅어지다가, 마침내 따뜻한 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전 14화12. 스며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