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던 당근이 주인공이 되기까지
우리 집 냉장고에는 오늘도 당근라페가 있다. 통을 꺼내 조금 덜어 먹고 다시 넣어둔다.
처음에는 당근라떼인 줄 알았다. 당근으로 라떼까지 만들어 먹나 싶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행이라는데, 나는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레시피를 찾아보고서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당근을 길게 썰어 양념해 먹는 음식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더 뜻밖인 것은 그 음식을 만들어달라고 한 사람이 우리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딸은 어려서부터 입맛이 까다로웠다. 당근, 파프리카, 가지, 호박을 싫어했고, 나물은 콩나물 말고는 잘 먹지 않았다. 안 먹는 것을 꼽다 보면 밥상에 올릴 채소가 마땅치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물컹한 식감이나 강한 향이 싫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런 것을 헤아리기보다 오늘은 또 무엇을 해 먹이나 하는 생각이 먼저였다.
같은 집에서 같은 밥을 먹고 자랐는데, 아들은 당근을 좋아했고 딸은 당근의 ‘당’ 자만 들어도 싫어했다. 한쪽에서는 잘 먹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골라내니 당근을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늘 난감했다. 나는 그래도 넣는 쪽을 택했다. 다만 딸이 모르게 넣으려고 애썼다.
잘게 다지고, 그래도 알아볼 것 같으면 갈았다. 딸이 잘 마시는 주스에 휴롬으로 짠 당근즙을 조금 섞어주기도 했다. 이만하면 모르겠지 싶다가도 색이 너무 달라 보이면 망설였다. 당근케이크에도 당근을 조금만 넣었다. 당근케이크를 만들면서 당근을 아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도 딸이 먹으면 됐다. 잘 먹고 있는데 굳이 당근이 들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호박도 사정은 비슷했다. 된장찌개에 넣으면 안 먹으니 카레에 넣었다. 푹 끓인 호박은 뭉개지며 노란 카레 속으로 사라졌다. 딸도 골라낼 수 없었다. 카레를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호박도 먹었네.
밥 한 끼에 나만 아는 성공이 숨어 있었다.
그러던 딸이 삼 년 전 어느 날 당근라페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레시피 속 당근은 숨을 생각도 없이 당당한 주인공이었다. 길쭉길쭉하게 썬 것이 그릇에 수북했고, 다른 재료 틈에 조금 끼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의 전부가 당근이었다. 이게 내가 어떻게든 눈에 안 띄게 하려고 다지고 갈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걸 먹겠다고?
남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을까. 유행이라니 궁금해졌을까. 딸의 속은 알 수 없었지만 안 먹던 것을 제 입으로 먹어보겠다고 하니 나는 서둘러 만들어주고 싶었다. 레시피를 따라 만들었다. 만들어놓고 보니 색이 참 예뻤다. 주황빛이 선명해서 그것 하나로 식탁이 환해졌다. 그동안은 음식에 주황색이 드러나면 딸이 알아챌까 신경을 썼는데, 이번에는 맛을 보기 전부터 그 색 때문에 자꾸 눈길이 갔다. 한 젓가락 집어 먹고 싶을 정도였다.
딸도 잘 먹었다. 조금 맛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집어 먹기도 하고, 빵에 곁들여 먹기도 했다. 빵과 함께 입으로 들어가는 당근을 보고 있자니 이상했다.
저렇게 훤히 보이는 것을 먹네. 다질 필요도, 갈 필요도 없네.
그동안 주스에 조금씩 섞어 넣은 당근은 얼마였을까. 도마 위에서 잘게 다진 것은 또 얼마였을까. 그렇게 해야 겨우 먹던 아이가 어디서 낯선 음식 이름 하나를 알아 와서는 저렇게 잘 먹었다. 허탈하기보다는 반가웠다. 유행이라는 것도 이럴 때는 쓸모가 있었다.
그 뒤로 당근라페를 자주 만들었다. 한 번 만들어놓으면 딸도 먹고 나도 먹었다. 학교 앞에 나가 살 때는 반찬과 함께 챙겨 보냈다. 당근으로 가득 찬 통을 보내면서 먹을까 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물론 딸이 당근과 완전히 친해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익은 당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카레를 끓이면 호박은 넘어가고 당근은 그릇에 남는다. 그래도 예전처럼 당근이라고 무조건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다. 나는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 카레 속 당근 몇 조각까지 다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당근라페는 그렇게 내 오래된 고민 하나를 덜어주었다. 처음 만들어본 그날, 나는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동안 딸의 밥상에서는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당근이, 이번에는 화면 속에서 주인공이 되었다. 뜻밖에도 그 영상이 내 유튜브 채널의 첫 히트 영상이 되었다.
며칠 사이 구독자가 백 명쯤 늘었다. 조회수가 올라가는 것을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봤다.
내가 만든 것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러 온다고.
딸에게 당근을 조금이라도 먹이려고 궁리하던 때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금 다시 보면 영상은 서툴다.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무엇을 먼저 보여줘야 할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당근을 썰고 양념하는 손만큼은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가족 밥을 해온 시간이 그 손에 남아 있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는 당근라떼인 줄 알았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때 딸이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음식을 언제쯤 알게 되었을까.
딸은 지금 다시 집에 와서 함께 산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오늘도 당근라페가 있다. 통을 꺼내 조금 덜어 먹고 다시 넣어둔다. 아침에 수란을 만들어 곁들이면, 하얀 달걀 옆의 주황빛이 고와서 먹기 전부터 기분이 좋다. 딸에게 먹이려고 만들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내 몫도 넉넉히 담는다.
예전에는 딸이 못 알아보게 하려고 당근을 썰었다.
요즘은 그 예쁜 빛깔을 보며 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