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해지려 할수록 추상적이 되는 말들

나는 왜 이 시간을 자꾸 설명하려 할까

by슬로하라


"한국에는 자주 가요?"

얼마 전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멈췄다면 간단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말을 더했다.


사실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지금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내게는 오아시스 같기도, 신기루 같기도 한 감사한 시간이라고. 한국에 닿는 순간 이곳에서는 잠시 떨어져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고.


커리어에 대한 불안, 타인의 시선,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 그 사이에 생긴 간극과 그 간극에서 이어지는 질문들이 따라온다고.


평소에는 조금 멀리 있던 것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갑자기 현실이 된다. 압박과 부담, 불안 같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느낌이 싫어서라도 굳이 가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시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여기 있는 동안 이것저것 배우고 경험해 보고 있다고. 당장 하나의 결과로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의 영역을 조금씩 넓히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과 새로 얻은 것들을 갈무리하고 버무리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고.


그러다 잠시 내 말하는 방식이 화제가 되었다. 내가 사용하는 말이나 표현에서 종교가 있는 사람의 언어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정확히 어떤 표현 때문인지는 짚어내기 어렵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말이 있다고 했다. 어떤 때에는 내가 조금 이상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정확하게 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편이라고 했다.


나는 직업적으로 정확함이 요구되는 자리에서는 나 역시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려 한다고 했다. 다만 내 생각이나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까지 구태여 하나로 뭉뚱그려 말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인 것 같다고도 했다.


흥미로웠다.




집에 돌아온 뒤 그 대화를 다시 생각했다. 히터 바람 같은 여름 공기에도 노을이 내려앉는 저녁이었다. 이곳에서 맞는 세 번째 여름이기도 했다.


처음엔 질문이 간단했다. "한국에는 자주 가요?"

그런데 내 대답에는 왜 그런지, 지금 머무는 곳과 돌아가야 할 곳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사이에서 나는 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까지 들어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종종 그렇게 말한다. 어떤 일을 겪고 나면 그때의 마음을 그대로 지나치기보다 오래 생각하는 편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마음도 있다.


그러는 동안 하나의 경험은 생각과 만나고, 생각은 내가 가진 가치와 이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단순한 것이었다. 불안해진다. 가기 싫다.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최대한 집중하고 싶다.


그렇게 말한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하게 전달하려면 그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날 내가 했던 말도 다시 생각해 보았다.


'한국에 가면 불안해서 가기 싫다'고 말하면 뜻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만으로는 정확하지 않은 느낌이 남는다. 그 불안에는 커리어도 있고, 타인의 시선도 있고,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도 있다.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마음과 언젠가는 이 시간이 끝난다는 마음도 함께 있다.


하나를 남기기 위해 나머지를 덜어내면 전달은 분명해지지만, 내가 경험한 것에서는 조금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마 나는 상대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정확함보다, 내가 실제로 경험하고 생각한 것에서 무언가를 빠뜨리지 않는 쪽의 정확함을 좇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꾸 말을 더한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다만 나는 그 요약으로 생각까지 끝내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무엇이 불안한지, 그 불안에는 타인의 시선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보다 내 욕심은 얼마나 큰지. 지금의 시간을 내가 유예라고 생각하는지, 준비라고 생각하는지. 그 시간을 지나며 실제로 무엇을 얻고 있고 무엇을 미루고 있는지.


처음에는 이름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것들을 들여다보다가 그나마 가까운 말을 찾는다. 불안, 기대, 간극.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구체화하려고 고른 말들이 오히려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내게는 각각의 말에 도착하기까지 구체적인 경험과 생각이 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그 과정을 모두 알지 못한다.


내게는 맥락인 것이 상대에게는 막연하게 들릴 수 있다. 내 안의 복잡한 결들을 구체화하려다가 다시 추상적인 언어에 도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의 시간을 '배우고 경험하며 내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일까.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고,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과 새로 얻은 것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나는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지탱하는 서사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조금 이상해졌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지금의 시간을 설명하고 싶은 걸까.


배우고 있다고, 넓혀가고 있다고, 아직 결과가 없을 뿐 과정에 있다고.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왜 자꾸 그 사실들을 꺼내 지금의 시간을 설명하려 하는 걸까.


어쩌면 나는 이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을 생각하면 자꾸만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래서 지금 무엇이 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과정에 있다’는 말은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동시에 아직 결과로 보여 줄 것이 없는 나를 지켜준다.


그런데 문득 질문이 거꾸로 돌아왔다. 왜 이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배운 것이 훗날 아무것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면. 해보았던 일들이 결국 내 일이 되지 않는다면. 지금 모으고 있는 것들이 끝내 하나로 잘 버무려지지 않는다면.


그러면 이 시간은 무엇이 되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지나간 경험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곤 했다. 그 안에서 생각을 찾고, 의미를 찾고, 그것을 내가 가진 가치와 이어보았다.


어쩌면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는 마음도 그와 닿아 있는지 모른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마음보다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이 견디기 쉽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시간보다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안심된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 설명해 온 것일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여기까지 쓰고 보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설명하려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또 이렇게 긴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설명을 그만두어야 할까.


모든 경험을 이해해야만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시간이 다음의 무엇으로 이어져야만 의미를 얻는 것도 아닐 테다.


지금 배우는 것들이 훗날 아무것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시간이 결국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금의 시간을 이렇게 열심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까.


그날 들은 말을 다시 떠올린다.


내 말이 왜 종교적으로 들리고, 때로는 이상적으로 느껴졌는지 이제는 조금 짐작할 것도 같다. 나는 하나의 경험을 말할 때에도 그 경험을 지나며 생긴 생각과 해석까지 함께 꺼내놓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말 뒤에 하나를 더 붙여본다.


설명하지 않고 남겨두는 것도 정확함일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질문만큼은 조금 더 설명하지 않고 두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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