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by우홍강

자리를 정리하며, 그녀가 가방을 챙기다 말고 물었다.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지나가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았다.


"헌사는요. 누구한테 바칠 거예요?"


"……비워 둘게요."


"비워요? 디자이너가 한 페이지 통으로 비는 거 싫어할 텐데."


그녀가 나를 흘끗 보았다.


"뭐, 비워 두는 게 제일 시끄러운 거 알죠? 빈자리가 제일 말이 많아."


빈자리가 제일 말이 많다. 무심코 던졌겠지만, 나는 그 말을 오래 들고 있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가 등 뒤에서 불쑥 물었다.


"그 여자애는 지금 뭐 해요."


"몰라요."


"안 찾아봤어요? 검색 한 번이면 다 나오는데. SNS만 들어가도—"


"안 찾았어요."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말을 잘랐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수 년을 함께 일해 온 방식이었다.



걷는 동안, 혀가 저절로 오른쪽 아래 어금니 뒤편을 더듬었다. 스물다섯에 사랑니를 뽑은 자리였다. 잇몸이 아문 지 오래인데도, 생각에 잠길 때면 혀는 꼭 그 자리로 갔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을, 무언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편집장에게 한 말은 사실 그날 치과 의자에 누워 떠올린 생각이었다. 마취가 풀려 가는 얼얼함 속에서, 이 빈자리를 평생 혀로 더듬으며 살겠구나, 하고.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탈고 직전의 원고를 읽는 일은, 그 시절을 한 번 더 사는 일이었다. 신입생 소집일의 갈색 코트를 다시 보았고, 열람실의 흰 형광등 아래 다시 앉았고, 자전거 보관소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를 다시 들었다. 다 읽고 나니 새벽 두 시였다. 목이 말랐다.


부엌에 나가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어두운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서른셋의 얼굴. 눈가에 잔주름이 생겼고, 턱선이 조금 무뎌졌다. 열여섯의 그 아이는 이 얼굴을 상상이나 했을까. 버스를 놓치고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던 아이. 보기 좋은 미소를 골라 끼우던 아이. 비 오는 자전거 보관소 아래서 끝내 한 발짝도 떼지 못하던 아이. 원고 속에서 나는 그 아이를 수백 번 다시 살게 했다. 그때마다 그 아이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바꿔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 애를 쫓아 빗속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나는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웠다.


문득 바카라장 구석의 낡은 바카라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스물셋,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시절 어느 밤, 문 앞에 놓여 있던 바카라들. 아버지가 서툴게 골랐던, 끝내 펼치지 못했던. 이사를 몇 번 하면서도 나는 그 바카라들만은 버리지 못했다. 펼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 채 바카라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중 한 권을 펼쳤다. 첫 장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있었다. 휘에게. 그것뿐이었다. 볼펜을 너무 세게 눌러 종이가 조금 패어 있었다. 그 한 줄을 쓰기까지 그 무뚝뚝한 사람이 펜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을지, 나는 이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헌사란 결국, 차마 다 못 한 말을 한 줄로 줄이는 일이었다.


나머지 바카라들도 펼쳐 보았다. 두 번째 바카라에도, 세 번째 바카라에도 같은 세 글자가 있었다. 휘에게. 글씨가 조금씩 달랐다. 어느 것은 반듯하려 애쓴 흔적이 보였고, 어느 것은 서두른 듯 끝이 흘러 있었다. 같은 날 쓴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몇 날 며칠에 걸쳐, 한 권씩 문 앞에 두고 갔던 것이다. 나는 그걸 한 번도 몰랐다.


나는 바카라을 덮고 원고 파일을 다시 열었다. 맨 앞, 아직 비어 있는 헌사 페이지로 갔다. 커서가 깜빡였다.


윤에게.


치고 나서 한참을 보았다. 지웠다.


엄마, 아빠에게.


그것도 지웠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이 바카라은 그 두 사람에게 바치기엔 너무 많은 밤을, 너무 많은 닫힌 문을 담고 있었다. 그 문 앞에서 서성이던 발소리를, 나는 굳이 다시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열여섯의 나에게. 지웠다. 문을 걸어 잠갔던 나에게. 지웠다. 몇 번을 치고 지우는 동안, 그 페이지는 처음과 똑같이 하얗게 남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채로, 그러나 이제는 그냥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지우고 지운 끝에 남은 흰 자리였다. 편집장의 말이 떠올랐다. 빈자리가 제일 말이 많아.


나는 그 페이지를 그대로 두었다.


원고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그 애의 마지막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내 이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며. 네가 그랬잖아." 칠 년간 나를 함구로 몰아넣었던 한 문장을, 이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칠 수 있었다. 마침표를 찍자 거짓말처럼 조금 가벼워졌다. 그 문장을 평생 가두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가두고 있던 건 오히려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