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by우홍강

대개 사랑이 그러듯, 나의 사랑도 이별 뒤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조금 뿌리내리듯이.


서른셋. 사람들은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내 이름이 박힌 바카라이 서점 평대에 깔리고, 띠지에는 '올해의 발견'이니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은'이니 하는 말들이 둘러졌다.


스물셋의 그 겨울, 횡단보도 앞에서 칠 년 만에 목소리가 터진 뒤로도 모든 것이 단번에 풀리진 않았다. 또래가 졸업장을 받고 군 생활을 마치고 첫 월급을 세는 동안, 나는 겨우 방문을 열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늦은 값을 한꺼번에 치렀다. 검정고시부터 다시 봤고, 스물넷에 신입생이 되었고, 스물일곱에야 머리를 밀었다. 강의실에서도 연병장에서도 나는 늘 형이었고 삼촌이었다. 한 박자씩 느린 사람.


첫 발표 수업에서는 단상에 서자마자 목이 잠겼다. 열여섯의 교탁 앞이, 전학 첫날의 자기소개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그 정적이 길어질수록 등줄기가 식었다. 그때 맨 앞줄의 누군가가 물병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후배였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첫 문장을 다시 시작했다. 떨렸지만, 끝까지 했다. 훈련소에서는 점호 때마다 관등성명을 크게 외쳐야 했다. 조교는 내 목소리가 작다고 몇 번이고 다시 시켰다. 나는 그때마다 웃음이 났다. 칠 년 동안 한 마디도 못 하던 목을 붙잡고, 누군가 더 크게 말하라고 다그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노를 한 번 놓아 버린 적 있는 사람은 안다. 다시 그 노를 잡는 데에도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글은 그 어디쯤에서, 나를 찾아왔다기보다 나를 붙들었다. 시작은 교양 수업의 짧은 과제였다. 자신에게 가장 오래 남은 한 문장에 대해 쓰시오. 나는 밤새 빈 화면 앞에 앉아 있다가, 새벽 무렵 그 문장을 썼다. 쓰고 나서 한참을 울었다. 교수는 그 과제에 점수 대신 한 줄을 적어 돌려주었다. 계속 쓰세요. 한때 세상으로부터 나를 숨겨 주던 활자가, 이제는 세상에 나를 꺼내 놓았다. 도망치려 읽던 인간이, 붙잡으려 쓰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원고가 막 탈고를 앞두고 있었다.


첫 바카라이 나오던 날, 어머니는 동네 서점에 가서 그 바카라을 열 권 샀다. 서점 주인이 무슨 바카라을 이렇게 많이 사시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쓴 거라고,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딘가 들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열 권 가운데 한 권을 거실 탁자 위에 세워 두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치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괜히 그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출판사 회의실은 늘 커피 냄새와 종이 냄새가 반반이었다. 창가의 화분은 몇 년째 시들지도 자라지도 않았고, 벽에는 이 출판사가 낸 바카라들의 표지가 액자에 걸려 있었다. 내 첫 바카라도 그 가운데 있었다. 맨 구석, 형광등 빛이 반사되는 자리였다.


"제목부터 다시 갑시다."


민 편집장은 빨간 펜으로 교정지 첫 장을 톡톡 두드렸다. 수 년째 내 문장을 난도질해 온 사람이었다. 그녀의 펜에 살아남은 문장만이 바카라이 되었고, 나는 그 칼을 누구보다 믿었다.


"사랑니요."


그녀가 인상을 구겼다.


"검색창에 치면 임플란트 광고가 먼저 떠요. MD가 보면 건강 에세이 매대에 꽂는다고. 작가님, 치과 옆자리에서 바카라 팔고 싶어요?"


"로맨스인데요."


"그러니까 문제죠. 뒤표지 카피를 어떻게 뽑아요. 독자가 바카라을 집겠어요, 스케일링 예약을 잡겠어요?"


나는 웃었다. 그녀의 독설은 수 년이 지나도 녹슬 줄을 몰랐다.


"솔직히 갈게요. 위험해요, 이거. 소재가 첫사랑, 학교폭력, 말 못 하는 남자, 칠 년 만의 재회. 클리셰 풀세트예요. 평론가 셋한테 보내면 둘은 '신파'라 적고, 하나는 읽다 졸아."


"진부한 거랑 진심인 거는, 독자들이 구분하겠죠."


"그걸 믿는 작가가 제일 위험해요."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 구분 못 넘어서 절판된 원고가 내 서랍에 백 권은 있어요. 다들 자기 건 진심이랬고."


그녀가 펜을 내려놓았다.


"근데, 그 벽을 하필 작가님은 넘겼더라고. 그래서 더 얄미워."


그녀는 표지 시안 두 장을 바카라상에 펼쳤다. 하나는 노란 바탕에 제목이 큼지막한, 누가 봐도 '잘 팔릴' 시안. 다른 하나는 거의 텅 빈 흰 표지였다. 한가운데,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작은 빈자리 하나만이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마케팅팀은 노란 거 밀어요. 평대에서 안 죽고, 온라인 썸네일에서도 안 죽고. 흰 거는 매대에 깔리면 옆 바카라 그림자에 묻힐 거예요."


나는 흰 시안을 집어 그 빈자리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걸로 가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팔리는 거랑 작가님이 원하는 게 십 년째 안 겹쳐. 회의 들어가서 나만 또 욕먹겠네."


"제목도 양보 못 합니다."


"이유라도 들읍시다. 설득되면 내가 마케팅팀 가서 받아쳐 줄게. 안 되면 그냥 노란 표지에 '첫사랑은 두 번 아프다' 박는 거예요. 알죠?"


"사랑니는요."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말을 고르는 일이, 한때는 무기를 고르는 일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다 자란 줄 알았을 때 뒤늦게 나요. 엉뚱한 자리에, 삐뚤게. 아프고, 결국엔 뽑아내야 하죠. 그런데 뽑으면 끝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죠. 그 빈자리로 혀가 자꾸 가니까. 없는 걸 굳이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러다 어느 날 보면, 그 빈자리째로 사는 데 익숙해져 있고요."


빨간 펜을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뽑힌 자리로, 혀가 자꾸 간다."


그녀가 그 문장을 따라 읽더니, 펜을 다시 들었다. 줄을 긋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백에 받아 적기 위해서였다.


"이거 띠지에 박읍시다. 토씨 하나 건드리지 말고. ……제목은 일단 가져가서 싸워는 볼게요. 장담은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