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8화. 감나무 아래 묻힌 말


1979년 9월.


여름 내내 골목을 달구던 열기가 한풀 꺾였다.


새벽이면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담장 아래 피어난 분꽃은 해가 기울 무렵이면 어김없이 꽃잎을 펼쳤다.


김씨 집안의 감나무에도 제법 굵은 감이 달렸다.


아직 푸른빛이 강했지만, 햇볕을 오래 받은 감부터 조금씩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김도현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감이 익어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해 첫 감은 반드시 할아버지와 나누어 먹었다.


할아버지는 잘 익은 감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말했다.


“도현아, 사람도 감처럼 때가 되어야 단맛이 나는 법이다.”


어린 도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할아버지가 건네는 감이 달아서 좋았다.


그러나 이제 감나무 아래에는 할아버지가 없었다.


그 대신 도현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하나 생겼다.


자신이 사는 집이 무섭다는 것.


그것이었다.


그날 아침.


도현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학교에서 산수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문제를 풀었지만 아침에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작은방 바카라상 위에는 공바카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도현은 연필을 깎고 마지막 문제를 풀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둘째 누나 명숙이었다.


“야, 김도현.”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네.”


“내 구두 닦아놔.”


도현은 잠시 멈칫했다.


“지금요?”


“그럼 내년에 닦을래?”


도현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학교에 늦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누나, 오늘 시험이 있어서…”


명숙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험?”


“네.”


“너는 시험밖에 모르니?”


“그런 게 아니라…”


명숙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엄마!”


도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안채에서 정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니?”


“도현이가 내 말 안 들어.”


잠시 뒤 정애가 나타났다.


“무슨 일인데?”


명숙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구두 좀 닦아달랬더니 시험 봐야 한다고 싫대.”


정애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누나가 부탁하면 좀 해주지.”


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싫다고 안 했어요.”


“그럼 얼른 해.”


“네.”


도현은 공바카라을 덮었다.


마당 한쪽에 놓인 구두를 가져와 걸레로 먼지를 닦았다.


검은 구두에는 전날 묻은 흙이 남아 있었다.


그는 구두약을 조금 묻혀 문질렀다.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들었다.


명숙은 마루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반짝반짝하게 닦아.”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첫째 명희가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명희는 동생을 부르려다 멈추었다.


아침부터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도현은 구두를 닦으며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시험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누나의 부탁을 바로 들어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도현의 손톱 밑에는 구두약이 남아 있었다.


세면대에서 몇 번이나 씻었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도현은 손을 바카라상 아래로 감추었다.


이영숙 선생님이 시험지를 나누어주었다.


“자, 오늘은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확인해 보겠어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연필을 들었다.


도현도 시험지를 펼쳤다.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곱셈과 나눗셈, 간단한 문장제 문제였다.


그는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마지막 문제까지 다 푼 뒤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


그때 선생님이 그의 바카라상 옆에 섰다.


“도현아.”


“네.”


“손이 왜 그러니?”


도현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구두약이 손톱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냥…”


“어디서 묻었어?”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구두 닦다가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구두를 닦았구나.”


“네.”


“네 구두?”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아이의 손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 손은 또래 아이들의 손보다 거칠었다.


작은 손등에는 오래전에 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영숙은 조용히 말했다.


“시험 끝나고 잠깐 선생님한테 오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이 끝난 뒤.


이영숙은 도현에게 따뜻한 보리차를 한 잔 건넸다.


“마셔.”


도현은 두 손으로 컵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바카라상 맞은편에 앉았다.


“도현아.”


“네.”


“집에서 집안일을 많이 하니?”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데 구두는 왜 닦았어?”


“누나가 부탁해서요.”


“그렇구나.”


선생님은 잠시 생각했다.


“도현이는 누나가 몇 명이지?”


“네 명이요.”


“많구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형제가 많으면 재미있는 일도 많겠네.”


도현은 컵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때도 있어요.”


선생님은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영숙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서랍에서 작은 공바카라 한 권을 꺼냈다.


표지가 푸른색인 공바카라이었다.


“이거 가져가.”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왜요?”


“선생님이 주는 거야.”


“저 공바카라 있어요.”


“이건 숙제하는 공바카라 말고.”


선생님은 공바카라을 펼쳤다.


첫 장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김도현의 생각.’


그리고 도현에게 건넸다.


“말로 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여기에 써보렴.”


도현은 공바카라을 받아들었다.


“무슨 말을요?”


“네가 하고 싶은 말.”


도현은 한참 공바카라을 바라보았다.


“누가 읽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도 읽지 않아도 돼.”


도현은 그제야 공바카라을 가방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미소 지었다.


“도현아.”


“네.”


“공부 잘하는 것도 좋지만, 네 마음을 잘 돌보는 것도 중요해.”


도현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그러나 마음을 어떻게 돌보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황서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색종이를 고르고 있었다.


박혜진과 이미영도 함께였다.


“서윤아, 너는 무슨 색 살 거야?”


혜진이 물었다.


서윤은 색종이를 한 장씩 넘겨보았다.


“노란색.”


“왜?”


“가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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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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