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헤어지는 두 시간이 더 멀었다

25화. 헤어지는 두 시간이 더 멀었다

도진과 함께 있는 날이면 이상하게 시간이 빨랐다.

기다릴 때는 그렇게 더디던 시간이 그를 만나기만 하면 달아났다.

아침에 만났는데 몇 마디 나누고 나면 점심이었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어느새 창밖의 빛이 기울었다.

서연은 그게 늘 아쉬웠다.

오늘도 그랬다.

“이제 가야겠다.”

도진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 한마디에 서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즐거웠는데.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치며 걸었는데.

‘가야겠다’는 말 하나가 떨어지는 순간, 하루의 온도가 달라졌다.

서연은 괜히 시계를 봤다.

“벌써?”

“응.”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말하고 나서 서연은 스스로 놀랐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도진도 잠시 서연을 바라봤다.

서연은 괜히 웃었다.

“아니야. 가. 내일 일해야 하잖아.”

도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연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손이 따뜻했다.

그래서 더 놓기 싫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두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두 시간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고, 기차나 지하철을 타고 조금만 견디면 닿을 수 있는 거리.

하지만 서연과 도진에게 두 시간은 그렇게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마음 하나만 들고 달려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도진에게는 도진이 바카라임져야 하는 일터가 있었다.

아침이면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루에도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서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를 쉬면 그 하루의 돈이 사라졌다.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을 버릴 수도 없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 전체를 멈출 수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바카라임져야 하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만나러 가는 두 시간보다 헤어지는 시간이 더 어려웠다.

“도진아.”

“응.”

“우리 다음에는 언제 보지?”

도진이 잠시 생각했다.

“봐야지.”

“그러니까 언제?”

“시간 만들어볼게.”

시간을 만든다.

서연은 그 말이 왠지 슬펐다.

젊었을 때의 사랑이라면 시간이 남아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은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일을 밀어내고,

약속을 옮기고,

잠을 줄이고,

때로는 하루치 수입을 포기하면서.

그렇게 겨우 만들어낸 몇 시간을 서로에게 건네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더 귀했다.

그리고 더 아팠다.

두 사람은 지하철역까지 천천히 걸었다.

평소라면 십 분이면 갈 거리를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역에 도착하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서연은 일부러 도진의 손을 세게 잡았다.

“왜?”

도진이 물었다.

“그냥.”

“손 아파.”

“그럼 놔?”

서연이 손을 빼려 하자 도진이 오히려 꽉 잡았다.

“누가 놓으래.”

서연은 웃었다.

그런데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사람과 있으면 자꾸 이상해졌다.

보고 있을 때도 보고 싶고,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그 손을 놓게 될 시간이 두려웠다.

“당신 이상하다.”

도진이 말했다.

“뭐가?”

“아까부터 말이 없어.”

“그냥.”

“또 생각하지?”

서연은 피식 웃었다.

“응.”

“무슨 생각.”

서연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오늘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도진의 걸음이 느려졌다.

서연은 앞만 바라봤다.

“당신 하고 있으면 하루가 너무 짧아.”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는 그렇게 긴 하루가.”

서연은 웃었다.

“당신만 만나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

도진이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나도 그래.”

그 한마디에 서연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역이 보였다.

서연은 갑자기 그쪽으로 가기 싫어졌다.

저 계단을 내려가면 끝이었다.

한 사람은 이쪽으로.

한 사람은 저쪽으로.

조금 전까지 하나였던 하루가 다시 둘로 갈라진다.

서연의 걸음이 멈췄다.

도진도 따라 멈췄다.

“왜?”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아.”

도진이 얼굴을 들여다봤다.

서연은 고개를 숙였다.

“나 이상하지?”

“뭐가.”

“헤어지는 게 너무 싫어.”

도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서연은 애써 웃었다.

“다시 볼 건데.”

“응.”

“두 시간밖에 안 되는데.”

“응.”

“그런데 왜 이렇게 싫지?”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이었다.

서연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싸운 것도 아니었다.

사랑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도진을 보내는 순간만 되면 가슴 한쪽이 무너졌다.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을 보내는 것처럼.

도진이 아무 말 없이 서연을 끌어안았다.

길 한가운데였다.

사람들이 옆을 지나갔다.

서연은 잠시 놀랐지만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도진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왜 이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도진이 말했다.

“조금만 이러고 있자.”

그 말에 서연은 결국 눈을 감았다.

조금만.

두 사람이 가장 자주 쓰게 된 말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조금만 더 걷자.

조금만 더 통화하자.

조금만 더 보고 있자.

사랑은 자꾸 조금만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 조금이 끝나면 결국 돌아서야 했다.

도진의 가슴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그 소리를 기억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두 시간 동안 꺼내 들을 수 있도록.

외로운 밤에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도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말라고 할까?”

서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정말 그러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해.

오늘만큼은 내일을 생각하지 말자고 해.

오늘 밤만큼은 우리가 바카라임져야 하는 세상을 잠시 잊자고 해.

서연은 도진의 품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러면 나 안 갈 수도 있어.”

장난처럼 말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도진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어른이었다.

붙잡고 싶다고 붙잡을 수 없는 나이.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는 나이.

내일이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도진이 서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가자.”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픈지 몰랐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 안으로 들어갔다.

개찰구 앞에 섰다.

이제 정말 헤어져야 했다.

서연은 교통카드를 손에 들고도 찍지 못했다.

도진이 웃었다.

“왜.”

“당신 먼저 가.”

“당신 먼저 들어가.”

“싫어.”

“왜?”

서연이 말했다.

“당신 뒷모습 보기 싫어.”

도진의 웃음이 사라졌다.

서연은 애써 웃었다.

“당신이 멀어지는 거 보는 게 싫어.”

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서연의 손에서 교통카드를 가져갔다.

삑.

대신 찍어주었다.

“들어가.”

“당신은?”

“당신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서연은 개찰구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봤다.

도진은 그대로 서 있었다.

두 걸음.

다시 돌아봤다.

아직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또 돌아봤다.

도진은 여전히 같은 자리였다.

서연은 손을 들었다.

도진도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서연은 울컥했다.

왜 이렇게 아플까.

사랑하는 사람이 저기 있는데.

서로 좋아하는데.

끝난 것도 아닌데.

왜 헤어지는 몇 분이 이렇게 잔인할까.

에스컬레이터가 서연을 아래로 데려갔다.

도진의 얼굴이 조금씩 사라졌다.

어깨가 사라지고,

얼굴이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손끝만 보였다.

그리고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다.

그 순간이었다.

서연의 가슴 한편이 정말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손안에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

서연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도진의 손을 잡고 있던 자리.

아직 따뜻했다.

그것이 더 아팠다.

지하철에 올라 창가에 앉았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연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바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자신에게 인지.

도진에게 인지.

아니면 이 나이에 다시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든 사랑에게 인지.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진이었다.

벌써?

서연은 급히 받았다.

“왜?”

도진이 물었다.

“울어?”

서연은 창밖을 바라봤다.

“아니.”

“거짓말.”

“안 울어.”

“목소리가 그런데.”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진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나도 싫다.”

“뭐가?”

“헤어지는 거.”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럼 어떡해.”

“모르겠어.”

도진이 처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모르겠어.

정답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일을 그만둘 수도 없고,

보고 싶다고 매일 두 시간을 건너갈 수도 없고,

함께 있고 싶다고 각자의 삶을 버릴 수도 없었다.

도진이 말했다.

“그냥 전화 끊지 말자.”

서연은 눈물을 닦았다.

“언제까지?”

“당신 집에 갈 때까지.”

“두 시간인데.”

“그러니까.”

서연은 결국 웃었다.

“당신 내일 일해야 하잖아.”

“알아.”

“피곤하잖아.”

“알아.”

“그런데?”

도진의 대답은 짧았다.

“같이 가는 거야.”

서연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이 너무 좋았다.

몸은 두 시간 떨어져 있어도 목소리만큼은 함께 가는 것.

그래서 두 사람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지하철이 몇 번이나 역을 지나고,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창밖의 풍경이 계속 바뀌는 동안 둘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뭐 해?”

“지하철 타고 있잖아.”

“알아.”

“그럼 왜 물어.”

“그냥.”

“당신은?”

“걷고 있어.”

“춥지?”

“조금.”

“담배 피우지 마.”

“안 피워.”

“거짓말.”

“진짜.”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외롭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 도진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서연은 문득 말했다.

“도진아.”

“응.”

“우리 왜 이렇게 힘들게 좋아하냐.”

도진이 웃었다.

“그러게.”

“조금 덜 좋아하면 편할 텐데.”

잠시 침묵.

그리고 도진이 말했다.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서연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왜?”

도진이 한참 뒤 대답했다.

“이미 늦었잖아.”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늦었다.

그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깊게 들어왔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좋아해 버렸다는 뜻 같아서.

서연은 창밖의 어둠을 바라봤다.

두 시간.

올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리가 돌아갈 때는 세상 끝처럼 멀었다.

하지만 그 긴 거리를 도진의 목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제야 서연은 알았다.

어른의 사랑은 매일 함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에도 상대를 혼자 보내지 않는 것.

떠나야 할 때 붙잡는 대신,

그 사람이 돌아가는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주는 것.

그것도 사랑이었다.

두 시간이 지나 서연이 집 앞에 도착했다.

“도착했어.”

도진이 말했다.

“문 열고 들어가.”

“응.”

“들어갔어?”

“응.”

“문 잠갔어?”

서연이 웃었다.

“잠갔어.”

“그럼 됐어.”

“끊게?”

도진이 잠시 말이 없었다.

서연도 끊지 못했다.

한참 뒤 도진이 말했다.

“서연아.”

“응.”

“다음에는.”

“응.”

“헤어질 때 울지 마.”

서연은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

“다 알아.”

“그럼 당신도 하나 약속해.”

“뭔데.”

서연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도 꼭 와.”

도진의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갈게.”

“진짜?”

“응.”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다.

“두 시간이 아니라 더 멀어도 갈게.”

서연은 눈을 감았다.

그날 처음 알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먼 거리는 두 시간이 아니었다.

서로를 향해 가지 않는 마음이었다.

마음이 서로를 향하고 있는 동안,

두 시간은 견딜 수 있었다.

아픈 것은 거리보다 헤어짐이었고,

그 헤어짐을 견디게 하는 것도 결국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날 밤 서연은 도진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품고 잠들었다.

두 시간이 아니라 더 멀어도 갈게.

어쩌면 사랑은 함께 있는 시간보다,

헤어진 뒤에도 서로에게 돌아가려는 마음으로 더 오래 이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25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