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마음은 서로에게 있는데
서연은 이제 알 것 같았다.
도진의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이 식은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두 사람을 더 힘들게 했다.
마음이 없으면 돌아서면 된다.
보고 싶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으면 되고, 사랑하지 않으면 서운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를 원했다.
보고 싶었다.
손을 잡고 싶었고, 얼굴을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싶었다.
하루가 끝날 때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날은 그보다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남자와 여자로.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서 밤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과 현실 사이에는 늘 두 시간이라는 거리가 있었다.
고작 두 시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두 사람에게 그 두 시간은 지도 위의 거리가 아니었다.
각자가 바카라임져야 하는 삶의 거리였다.
도진에게는 현장이 있었다.
건설 현장은 그가 보고 싶다고 해서 멈춰주는 곳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전화가 울렸고, 무전기에서는 계속 누군가가 그를 찾았다.
사람이 빠지면 대신 사람을 구해야 했고, 일정이 틀어지면 맞춰야 했다.
문제가 생기면 결국 누군가는 바카라임져야 했다.
도진은 그 자리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하루는 그냥 하루가 아니었다.
일하지 않는 하루는 쉬는 날인 동시에 수입을 포기하는 날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데이트 한 번을 위해 하루쯤 비우는 것이 쉬운 일이겠지만 서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에는 이상한 모순이 생겼다.
마음은 서로에게 있는데,
몸은 늘 각자의 삶에 묶여 있었다.
어느 날 도진이 말했다.
“보고 싶다.”
서연은 한동안 그 말을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곧바로 대답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데 그날은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 볼까?’
그리고 그다음에는 달력이 나온다.
도진의 근무일.
서연의 근무시간.
이동시간.
막차.
다음 날 출근.
돈.
피로.
두 사람은 사랑을 이야기하다가 결국 시간표를 들여다봐야 했다.
서연은 한참 뒤 답했다.
‘나도.’
도진에게서 곧 전화가 왔다.
“언제 볼 수 있어?”
서연은 웃었다.
슬픈 질문인데 웃음부터 나왔다.
“글쎄.”
“이번 주?”
“나 일해.”
“일요일?”
“일요일도.”
“끝나고는?”
“너무 늦어.”
도진이 조용해졌다.
서연이 물었다.
“당신은?”
“나도 이번 주는 현장 못 빠져.”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한데,
만날 수 있는 날은 없었다.
서연이 장난처럼 말했다.
“우리 연애하는 거 맞아?”
도진이 웃었다.
“그러게.”
“얼굴도 못 보는데 무슨 연애야.”
도진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마음은 맨날 보잖아.”
그 말에 서연의 가슴이 아렸다.
마음은 맨날 본다.
그런데 사람은 마음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서연은 도진의 손이 그리웠다.
길을 걸을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손.
식당에서 마주 앉아 자신을 바라보던 눈.
헤어지기 직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괜히 말을 늘이던 순간.
전화기 속 목소리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존재를 갈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안고 싶고,
기대고 싶고,
함께 잠들고 싶고,
눈을 떴을 때 가까이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
서연에게도 그런 욕망이 있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사랑이 마음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늦게 찾아온 사랑이라 더 간절한 순간도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계절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더 아팠다.
마음은 이렇게 가까운데,
사람은 왜 이렇게 멀리 있는지.
어느 날 새벽 서연은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
‘같이 있고 싶다.’
보내고 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보고 싶다’보다 조금 더 깊은 말이었다.
도진은 잠시 뒤 답했다.
‘응. 출근해?’
서연은 웃었다.
역시 도진이었다.
자신이 어렵게 마음을 꺼내놓았는데 돌아오는 말은 출근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서운하지만은 않았다.
그 말 안에도 현실이 있었으니까.
같이 있고 싶다.
그런데 오늘 출근해?
나는 일해야 하고,
당신도 일해야 하고.
그래서 지금 당장 갈 수는 없고.
그것이 두 사람의 사랑이었다.
며칠 뒤 서연은 여자친구들과 하루 여행을 떠났다.
오랜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다.
좋은 것을 먹고, 걷고, 사진도 찍었다.
그날만큼은 도진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도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서연은 휴대전화에 뜬 이름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그를 기다릴 때는 오지 않던 전화가,
자신이 자기 하루를 살고 있을 때는 두 번이나 왔다.
“응.”
“뭐 해?”
“친구들이랑 있어.”
“재밌어?”
“응.”
“많이?”
“응. 많이.”
도진이 웃었다.
“잘 놀다 와.”
“응.”
통화는 길지 않았다.
그런데 서연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도진이 자신을 찾았다.
그것이면 됐다.
그날은 더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에는 서연이 움직였다.
도진이 있는 곳으로.
보고 싶어서였다.
그 이유 하나였다.
두 시간이 걸리든,
몇 시간을 만나든,
그날은 그냥 보고 싶었다.
도진은 일하고 있었다.
서연이 도착했을 때도 전화 중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도진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다.
반가움.
놀람.
그리고 미안함.
“왔어?”
“응.”
“많이 기다렸어?”
“아니.”
그 순간에도 무전기에서 도진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은 짧게 대답했다.
“네. 확인할게요.”
그리고 다시 서연을 바라봤다.
“밥 먹었어?”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밥 먹자.”
그렇게 겨우 점심시간을 만들었다.
데이트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한 시간이었다.
분위기 좋은 식당도 아니었고,
둘만의 장소도 아니었다.
도진의 휴대전화는 식사 중에도 계속 울렸다.
“잠깐만.”
전화.
다시 숟가락.
그리고 무전기.
“네. 지금 갑니다.”
서연은 처음에는 조금 서운했다.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두 시간을 건너왔는데.
당신 얼굴 하나 보겠다고 왔는데.
그런데 도진을 바라보다 그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도진의 얼굴이 바뀌었다.
방금 전 자신에게 웃던 남자가 순식간에 현장 바카라임자의 얼굴이 되었다.
목소리도 달라졌다.
짧고 정확했다.
서연은 그제야 도진이 그동안 말했던 ‘일’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정말 이렇게 사는구나.’
자신을 피하려고 바빴던 것만은 아니었다.
정말 이런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에도 서연의 마음 한쪽은 여전히 아팠다.
이해한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밥을 다 먹고 밖으로 나왔다.
도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가야 하지?”
“조금만 더 있어도 돼.”
“거짓말.”
“진짜.”
그 순간 무전기에서 다시 도진을 찾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봐.”
서연이 말했다.
도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왜 미안해.”
“당신 여기까지 왔는데.”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말 하나가 가슴에 걸렸다.
도진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연이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시간으로는 두 시간이지만,
그 두 시간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두 사람은 잠시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 섰다.
도진이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오늘 처음으로 연인이 된 것 같았다.
서연은 그의 손을 바라봤다.
“도진아.”
“응.”
“우리 참 어렵다.”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은 이렇게 쉬운데.”
서연이 그의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같이 있는 건 왜 이렇게 어려워.”
도진이 낮게 말했다.
“그러게.”
그뿐이었다.
둘 다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각자의 삶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서연은 도진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댔다.
길지 않았다.
몇 초.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도진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전화도,
무전기도,
현장도 없는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만 있었다.
서로를 원하는 두 사람.
서연은 눈을 감았다.
조금 더 있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오늘 하루를 다 가지고 싶었다.
저녁도 먹고 싶었다.
밤길도 걷고 싶었다.
어디든 들어가 둘만 있고 싶었다.
도진의 가슴에 오래 기대고 싶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도진 역시 서연을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가 천천히 놓았다.
그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갈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또 전화가 울렸다.
도진이 화면을 보았다.
서연이 먼저 손을 놓았다.
“받아.”
“잠깐만.”
“받아. 일 전화잖아.”
도진은 결국 전화를 받았다.
“네. 말씀하세요.”
서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리웠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데도,
벌써 헤어진 사람처럼 그리웠다.
잠시 후 도진이 전화를 끊었다.
“서연아.”
“응.”
“나 가봐야 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들으니 가슴이 내려앉았다.
서연은 웃었다.
“응. 가.”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래도.”
“당신 일하는 모습 보러 온 셈 치지 뭐.”
도진이 웃지 못했다.
“다음에는 내가 갈게.”
서연은 그 말을 듣고도 약속을 확인하지 않았다.
언제?
정말?
몇 시?
묻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올 수 있을 때 와.”
도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서연은 웃었다.
“대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는 해.”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럴게.”
헤어지기 직전 도진이 다시 서연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조금 오래.
“잘 가.”
“응.”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손을 놓지 않았다.
서연이 먼저 웃었다.
“이러다 당신 또 무전기에서 찾겠다.”
도진도 웃었다.
그리고 정말 손을 놓았다.
한 손가락씩 떨어졌다.
마지막 손끝이 떨어지는 순간,
서연의 가슴 한쪽이 또 무너졌다.
겨우 두 시간도 되지 않았다.
두 시간을 와서,
두 시간도 함께 있지 못하고,
다시 두 시간을 돌아가야 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왜 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힘들면 만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쉬운 답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어려운 답이 된다.
서연은 돌아가는 길에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 도진과 무엇을 했지?
밥을 먹었다.
전화받는 모습을 봤다.
무전기 소리를 들었다.
손을 잠깐 잡았다.
어깨에 잠깐 기대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가슴에는 하루 종일 함께 있었던 것처럼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늘 봐서 좋았어.’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너무 짧았다.’
그것도 지웠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만 적었다.
‘도진아. 나는 아직도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
보내지는 않았다.
휴대전화를 가슴에 올려놓았다.
말하지 않아도 도진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도진 역시 같은 말을 삼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같이 있고 싶다.
더 오래.
조금만 더.
그러나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마음이 간절하다고 현실이 비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젊은 날의 사랑은 때로 모든 것을 버리고 달려갈 수 있었지만,
어른의 사랑은 그러기 어려웠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일.
생계.
바카라임.
각자가 살아온 삶.
그래서 서연과 도진의 사랑은
서로를 갖는 사랑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시간 사이에서 서로를 놓치지 않는 사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오늘도 두 시간은 너무 멀었고,
함께한 두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런데도 다시 묻는다면,
또 갈 것 같았다.
그 사람이 그곳에 있으니까.
사랑이 가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어서 가는 것.
어쩌면 두 사람에게 허락된 사랑은
그 정도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실이,
서연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프면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좋았다.
42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