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없는 복음》 1장 — 주재권, 욕망, 순종 그리고 불완전한 성화
존 맥아더 목사님의 《주님 없는 복음》 1장을 읽으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단어는 ‘주님’이었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
기도를 시작할 때도 주님이라고 부르고, 찬양할 때도 주님이라고 부르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을 찾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생긴다.
정말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신가.
아니면 나는 예수님을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는 믿지만, 실제 삶의 주인은 여전히 나 자신인 것은 아닐까.
맥아더가 1장에서 던지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는 구원자가 아니라, 나에게 권리를 가지신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주’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존칭 이상의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위치도 정해진다.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그분께 속한 사람이다.
맥아더는 이 관계를 매우 강하게 표현한다.
주인과 종.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다.
오늘날 ‘노예’라는 단어는 불편하다. 특히 서구 슬롯에서 노예제도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끔찍한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의 ‘둘로스’라는 말을 영어 성경들이 오랫동안 ‘노예’보다 ‘종’이나 ‘하인’처럼 완화해 번역해 온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맥아더가 강조하려는 것은 인간 노예제도의 정당성이 아니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의 문제다.
종은 주인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라는 표현에는 그보다 훨씬 강한 뜻이 들어 있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위해 가끔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라는 고백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그 말은 단순히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에게 내 삶을 다스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씀 앞에서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나는 너무 자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 마음대로 살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는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결정할 때는 내가 주인이 된다.
무엇을 선택할지 판단할 때 내 욕망이 먼저 말한다.
내 자존심이 말하고, 내 두려움이 말하고, 돈이 말하고, 사람들의 평가가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충분히 듣고 이미 결론을 내린 뒤 마지막에 하나님께 그 결론을 승인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누가 주인인 것일까.
맥아더가 말하는 ‘주재권 구원론’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영어로는 Lordship Salvation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내가 완벽하게 순종해야 그 대가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둘로 나누어, 구원자로는 받아들이면서 주님으로는 거부하는 믿음일 수 없다는 주장에 가깝다.
로마서에서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즉 믿음의 대상은 내가 만들어 낸 편리한 예수가 아니다.
구원자이시면서 동시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내게는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보좌에 모신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삶에 적용하려고 하면 생각보다 모호하다.
하루 종일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뜻일까.
무엇을 결정할 때마다 마음속에서 특별한 음성을 기다리라는 뜻일까.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까지 주님께 묻고, 자동차 한 대를 살 때도 어떤 모델이 하나님의 뜻인지 특별한 표적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산다면 오히려 신앙이 지나치게 긴장된 상태가 되지 않을까.
매 순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검사한다면 신앙은 자유보다 불안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보좌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주님을 마음의 보좌에 모신다는 것은 모든 사소한 결정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 삶에서 최종적인 권위를 누구에게 인정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내 욕망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누구의 말이 옳다고 인정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조금 선명해진다.
사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성경을 통해 알려져 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겸손하라.
정직하라.
이웃을 돌아보라.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라.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
맡은 일에 충성하라.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뜻에 순종하기 싫어서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나를 미워한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내 이익을 위해 거짓말해도 되는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해도 되는가.
그것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이런 문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 문제다.
반면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느 자동차를 살지 같은 문제는 다르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선택에서 특별한 계시를 기다리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경험과 지혜를 사용하여 선택하면 된다.
성경의 가치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 능력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더 바카라임 있게 판단하는 것이다.
“주님께 맡겼습니다”라는 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믿음은 아닐 것이다.
농부는 하나님께 풍년을 구하지만 씨를 뿌린다.
밭을 갈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다.
그러나 씨앗 안에서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
어쩌면 신앙의 맡김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나 자신을 바라보면 더 근본적인 문제가 보인다.
나는 과연 아무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면 자유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쉽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어야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오늘 내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가만히 바라본다.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인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애쓴다.
좋은 것을 먹고 싶어 한다.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한다.
성적 욕망을 충족하고 싶어 한다.
성공하고 싶고, 남보다 뒤처지고 싶지 않고,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어 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에게 이런 욕망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들이 하루의 상당 부분에서 나에게 명령한다.
돈이 나에게 일어나라고 말한다.
인정 욕구가 더 노력하라고 말한다.
두려움이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자존심이 사과하지 말라고 말한다.
욕망이 지금 당장 이것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매일 수많은 주인의 명령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이 결국 무엇인가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말한다.
죄의 종이 되든 순종의 종이 되든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는 것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가 될 수 있는지를 조금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아무런 주인도 없는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주인에게서 해방되어 참된 주인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주인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주인을 섬기는가가 중요하다.
폭군이 주인이라면 나는 불행하다.
그 주인은 나를 이용하고 나의 생명과 자유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모시킬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주인이시다.
그분은 종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인간의 노예제에서는 종이 주인을 위해 죽는다.
복음에서는 주인이 종을 살리기 위해 죽는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으며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십자가에 죽기까지였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잔인한 주인의 소유가 된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나보다 나를 더 깊이 아시고, 나의 참된 선을 원하시며,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분께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진짜 신앙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그분이 선한 주님이라는 것을 안다.
그분의 말씀이 옳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없이 내 삶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려 한다.
잠시 주님께 맡겼다가 다시 움켜쥔다.
기도하며 내려놓았다가 어느새 다시 계산하고 통제한다.
용서하기로 했다가 다시 분노한다.
겸손해지겠다고 했다가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끊임없이 그분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고 한다.
그것이 죄로 기울어진 인간의 자연스러운 방향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의 보좌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평생 반복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포기는 아니다.
나는 결코 완전한 순종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완전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완벽하게 왕좌에서 내려온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그 자리에 올라앉았음을 깨달을 때마다 내려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회개이고 성화일 것이다.
성화는 긴장이다.
내 안에는 여전히 욕망이 있다.
그 욕망 자체를 모두 악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먹고 싶은 마음도, 쉬고 싶은 마음도, 좋은 것을 누리고 싶은 마음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다.
나는 그것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싶다.
문제는 그것들이 내 삶의 왕이 되는 순간이다.
욕망은 삶을 움직이는 엔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운전대까지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욕망을 없애려고 하기보다 욕망이 내 마음을 압도하지 않도록 살아가고 싶다.
돈도 필요하다.
인정도 좋다.
좋은 것을 누리는 것도 감사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에게 최종 명령을 내리는 주인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자리는 그리스도의 자리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내 안에서는 계속 두 힘이 줄다리기를 할 것이다.
나를 중심에 놓으려는 힘과 그리스도께 삶을 맡기려는 힘.
어쩌면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이 긴장은 완전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제 중요한 것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한다.
넘어졌을 때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내 욕망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결국 누구를 옳다고 인정하는가.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합리화하며 계속 나아가는가, 아니면 다시 그리스도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나는 그 방향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너무 집착적으로 내 신앙 상태를 검사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다.
매 순간 “지금 주님이 내 보좌에 계신가, 내가 앉아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자기집착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순종하고, 알 수 없는 것은 지혜롭게 선택하고, 잘못했을 때 회개하고, 내가 할 일을 바카라임 있게 하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싶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여기가 내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나의 순종이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
나의 성화가 나를 의롭게 만들지 않는다.
내가 마음의 보좌를 얼마나 오래 주님께 내어드렸는지를 계산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는 것도 아니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의 보혈이다.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리스도를 믿는 나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칭의의 근거는 나에게 있지 않다.
그리스도에게 있다.
나는 그 사실을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다시 성화의 길을 걷는다.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을 배우는 것이다.
완벽한 순종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이기에 주님을 닮아가고 싶은 것이다.
구원에는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완고한 마음을 어떻게 여시고, 어떻게 수십 년의 삶과 실패와 사람과 고난을 사용하여 그를 붙드시며, 어떻게 끝까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는지 그 모든 과정은 우리의 이해보다 깊다.
그곳에는 신비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신앙의 마지막을 내 노력에 걸고 싶지 않다.
나는 앞으로도 왕좌에 올라가려 할 것이다.
또 내려올 것이다.
욕망에 끌려갈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릴 것이다.
순종할 것이고, 실패할 것이며, 다시 회개할 것이다.
그 과정이 어쩌면 나의 남은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긴장 가운데 한 가지는 분명히 붙들고 싶다.
내 마음의 왕좌는 원래 나의 자리가 아니다.
나는 수없이 그 자리에 올라가겠지만, 그 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붙잡고 싶은 희망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그 왕좌를 비워냈는가가 아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분은 부족하지 않다.
나의 순종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분의 순종은 완전했다.
나의 성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구원의 근거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시 그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한다.
그리고 조용히 고백한다.
주님,
이 자리는 원래 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