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온도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하여
신앙에도 계절이 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롭다. 말씀 한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찬양 한 곡에도 눈물이 난다. 기도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 비슷하다.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에게 상대방은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자꾸 생각나고, 만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영원하지 않다.
결혼한 부부가 언제나 연애 첫날의 감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없듯, 신앙에도 리듬이 찾아온다. 어느 날은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느껴지고, 어느 날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늘이 닫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씀을 읽는 것이 기쁨일 때도 있지만 의무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이상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가장 신앙이 뜨거울 때 죽는 것이 가장 좋은 것 아닐까?
조금 우스운 질문처럼 들리지만, 생각해 보면 꽤 심각한 문제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죽는 순간의 신앙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면 어떨까.
어제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다.
오늘은 낙심했다.
그러나 내일이면 다시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죽었다면?
반대로 오랫동안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살다가 어느 날 크게 회개했고, 바로 다음 날 죽었다면 그는 가장 좋은 순간에 인생을 마친 것인가.
그렇다면 구원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는 셈이 된다.
죽는 시점을 인간이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더 깊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보시는가.
평생 신앙생활의 평균을 내시는가. 가장 뜨거웠던 순간을 보시는가. 가장 나빴던 순간을 보시는가. 아니면 마지막 순간의 영적 상태를 보시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방식이라면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
존 맥아더의 《주님 없는 복음》을 읽으며 계속 마주하게 되는 말이 있다.
삶의 방향성.
참된 믿음이 있다면 삶에는 반드시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단순히 지옥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깊이 동의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드릴 생각조차 없으며, 평생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그 믿음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두렵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변화되어야 하는가.
얼마나 예수님의 주재권을 인정해야 하는가.
70퍼센트면 충분한가.
80퍼센트인가.
90퍼센트인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측정할 수 있는가.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관찰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나는 다시 내 삶의 중심에 나를 세운다.
내 계획.
내 성공.
내 자존심.
내 욕망.
내 판단.
그리고 하나님께 묻기보다 하나님에게 내 계획을 승인해 달라고 기도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다.
뱀은 인간에게 말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죄의 가장 깊은 뿌리는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죄란 어쩌면,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내면의 왕좌에 내가 앉는 것이다.
내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되고, 내가 삶의 최종 결정자가 되고, 하나님조차 내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화란 무엇일까.
나는 이제 그것을 왕좌에서 영원히 내려오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 동안 반복하여 내려오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려왔다가 또 올라간다.
회개하고 또 교만해진다.
하나님께 맡겼다가 다시 움켜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닫고 다시 내려온다.
어쩌면 성화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 자기 왕좌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우는 것.
그래서 나는 결국 십자가 앞에 다시 서게 된다.
내 신앙의 뜨거움을 바라보면 확신할 수 없다.
내 순종을 바라보아도 확신할 수 없다.
내 성화를 바라보아도 확신할 수 없다.
좋은 날도 있지만 형편없는 날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나는 의롭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내가 충분히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칭의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성화가 시작된다.
구원받기 위해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조차 혼자 이루어 내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나는 성화를 종종 왈츠에 비유하고 싶다.
왈츠를 출 때 두 사람이 모두 움직이지만 둘이 동시에 이끌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이끌고 다른 사람이 그 움직임에 자신을 맡긴다.
우리의 성화도 그렇지 않을까.
성령께서 이끄시고 우리는 응답한다.
때로는 발을 잘못 디딘다.
박자를 놓친다.
심지어 내가 춤을 이끌겠다고 고집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손을 내미신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 손을 잡는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그분의 리듬을 배워 간다.
평생을 살아도 완벽한 춤을 추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춤추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손을 붙잡고 있느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가장 뜨거울 때 죽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가장 차가운 시기에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평생을 그 한 순간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
구원은 신앙의 온도계를 가지고 평균을 내는 일이 아니다.
구원의 근거는 내가 얼마나 뜨거웠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에 있다.
그렇다고 삶의 방향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때로 멀어져도 돌아오게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게 하며,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았던 사람이 조금씩 그 왕좌를 그리스도께 내어드리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붙잡고 싶은 신앙의 문장은 이것이다.
나는 구원받기 위해 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화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길조차 혼자 걷지 않는다.
어쩌면 복음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붙들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복음은 오히려,
내가 수없이 손을 놓았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다시 왕좌에서 내려온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