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상미는 계단을 내려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완아. 완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상미의 발소리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상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게 만든
내가 싫었다.
상미는 계단을 모두 내려오자마자
내 팔에 팔짱을 꼈다.
나는 팔을 빼지도 않았고
상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상미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화났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미는 빨리 돈을 모아
우리 방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손님이 주는 술을 몇 잔 받아 마셨지만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며
나도 알고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이제 그만 화를 풀라고 했다.
그러고는 오늘 자기가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더 화가 났다.
상미에게 화가 나서만은 아니었다.
상미가 그곳에서 번 돈으로
내게 무언가를 사준다는 사실이 싫었다.
조금 전 가게 안에서 본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기모노 사이로 보이던 속옷과
걸을 때마다 드러나던 허벅지.
술을 마신 듯 붉어진 얼굴.
그런 곳에서 번 돈으로
나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말하는 상미가
안쓰럽고 미안했다.
내가 정말 상미의 남자친구가 맞을까.
이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친구를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남자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상미를 그곳에서 일하게 해 놓고
남자친구라며 가게에 찾아가 소리를 지른 내가
부끄러웠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걱정했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대신 퉁명스러운 말만 쏟아냈다.
“됐어. 사주긴 뭘 사줘.”
말을 시작하자
참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따졌다.
연락이 되지 않으니
결국 가게까지 찾아간 것 아니냐고 했다.
상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뱉는 말들은
걱정보다 화에 가까웠다.
“당장 그만둬.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잔업을 더 많이 해서라도 돈을 모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정리한 말이 아니었다.
걱정했던 마음과
그곳에서 일하게 했다는 미안함,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바카라이
뒤섞인 채 입 밖으로 나왔다.
상미를 걱정하는 마음은 짜증이 되었고,
미안함은 날이 선 말투가 됐다.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자꾸 거친 말만 나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스물한 살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서툰 사랑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미는 내 말을 듣고 있다가
일단 알겠다고 했다.
밖은 추우니
어디든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탔다.
평소처럼 모텔로 가지 않았다.
조금 더 차분하게
상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택시에서 내려 들어간 곳은
처음 상미를 만났을 때 갔던 호프집이었다.
해상 선배와 셋이 술을 마셨던 곳.
나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고,
해상 선배와 상미 사이에서 느꼈던
불편함도 떠오르는 장소였다.
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연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처음 만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상미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나는 상미의 얼굴을 바라봤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전과 달라 보였다.
상미는 말없이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웃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쩌면 자신이 내게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언가에 승리한 사람의 표정일까.
나보다 한 걸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눈빛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내가 받아들인 상미의 표정이었다.
상미가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미는 담배 연기를 내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완아, 너 진짜 나 사랑하나 보다.”
그 말을 듣자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미를 사랑했다.
조금 전에도 상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견딜 수 없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늦은 밤 참치집까지 찾아갔다.
험상궂은 남자가 욕을 하는데도
상미를 찾으며 소리를 질렀다.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상미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무서움을 앞섰을 뿐이었다.
나는 상미에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넌 나 안 사랑해?”
상미는 자신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 곁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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