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히 피어나는 꿈

- 너의 열정을 나는 보았네

by별숲지기


고요히 피어나는 꿈

- 너의 열정을 나는 보았네



고단한 어느 오후

조용히 걸어온 말이

텅 빈 연습실을 흔드는

영롱한 파도였다지


너울거리는 손과 손 사이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가벼이 한 발 오르는 순간마다

젖은 날개를 털고 날아오르는

새의 그리움처럼


너와 함께

두둥실


점점 깊어지는

파도의 소리에서

나는 보았지


가늘게 흐르는 줄기마다

단단히 맺힌

너희들의 꿈망울을


고요히 피어나는

꿈의 노래를






“선생님, 오늘은 진로실 말고 댄스실에서 상담하면 안 돼요?”


몇 달 전 예술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상담했던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아이의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무슨 뜻일까 싶었지요.


“왜 댄스실에서 하고 싶어?”

“오늘 뮤지컬 모의고사가 있는데요… 제가 준비한 걸 한번 봐주시면 안 될까요?”

순간 조금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습니다.

“선생님이 뮤지컬을 좀 볼 줄 안다고 생각했니?”

아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네.”


예술을 좋아하는 제 마음을 아이가 먼저 알아봐 준 것 같아 괜히 기뻤습니다.

가녀린 몸짓 끝에 뮤지컬 대사가 노래처럼 흘러나왔는데, 그 순간 저는 숨을 삼켰습니다.

맑고도 청아한 목소리가 텅 빈 댄스실 가득 번져나가자

낡은 바닥과 거울까지 환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느새 진로교사가 아니라 공연장을 찾은 관객이 되어 있었습니다.

돈 한 푼 내지 않고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있어도 되나 싶을 만큼,

그 아이의 눈빛과 떨리는 숨결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했니?”

“학원 다닌 지는 몇 개월 안 됐어요.”

저는 조금 놀란 마음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니? 어릴 때부터 예술을 좋아했던 건 아닐까?”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 가족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조금 했고 지금은 성우 활동도 하고 있어요.”

순간 호기심이 생겨 저는 아이에게 채널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아이는 무척 쑥스러운 얼굴로 한참 망설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채널명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컴퓨터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화면 속에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구독자 수가 상당한 채널이었고, 그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 앞에서 웃고 울며 자라온 아이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노래도, 춤도, 연기도, 공부도 모두 다재다능한 아이였지만

정작 아이는 자꾸만 학원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 실력이 괜찮은 걸까요? 학원에는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요.”

저는 잠시 아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습니다.

“잘하는 사람은 늘 많지. 그런데 너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아이는 한 명밖에 없어.

너만의 결은 결국 너를 네 자리로 데려갈 거야.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는 한참 말이 없다가 작게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참 오래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오래전 제자 한 명이 떠올랐습니다.


처음 발령받았던 신규 시절의 제자였습니다.

오십이 넘은 지금도 저는 여전히 서툰 사람이지만, 그때의 서툼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습니다.

지금은 부족함을 인정하며 천천히 아이들 곁에 머무르려 한다면, 그때의 저는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 속에서 자꾸만 아이들을 제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영상연출과 담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교실보다 작화실에서 더 오래 생활하고 있었고, 영화 공모전 등을 준비하며 밤늦도록 자기 세계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저는 그런 아이들의 뜨거움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자주 겁이 났습니다.

너무 자유롭고 개성이 강한 아이들 앞에서 그 당시 저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생활지도가 흔들리면 마음도 함께 흔들렸고,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곤 했습니다.


그 무렵 한 학생이 제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만드는 영화에 잠깐 출연해 주실 수 있어요?”

저는 그때 조건을 걸었습니다. “너희들이 약속을 잘 지키면 내가 해줄게”라고요.

그런데 촬영을 앞두고 학급에서 또 마음이 뒤엉키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약속했던 생활 규칙을 잘 지키지 않았고, 저는 그 감정을 풀지 못한 채 속으로 서운함을 키우고 있었지요.

결국 저는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너희도 선생님과 약속 안 지켰잖아. 그러니 선생님도 이번엔 못 해주겠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도 유치하고 미성숙한 말이었습니다.

교사이기 전에 감정적으로 흔들린 어른의 말이었고, 아이와 같은 높이에서 서운함을 되갚아버린 행동이었습니다.

아마 그 아이는 무척 불쾌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오래 준비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고, 용기를 내어 담임교사에게 부탁했던 일이었는데 저는 그것을 너무 가볍게 무너뜨렸으니까요.

어쩌면 그 일로 인해 교사라는 존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간절함 앞에서 감정을 앞세운 어른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그 아이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미안합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이 이야기를 그대로 꺼내는 것이 많이 두려웠습니다.

누구나 지금의 저를 보면 결코 그런 교사였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 시절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한다면 그건 그때의 제자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앞에서 자신의 꿈을 떨리는 목소리로 보여주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자꾸 그 시절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꿈 앞에서 함부로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

누군가의 서툰 가능성을 끝까지 지켜봐 주는 교사로 남아야겠다는 생각을요.


얼마 전 문득 그 제자가 생각나 이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유난히 컸던 아이였기에,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기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제 예상처럼 꾸준히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고, 마침 올해 초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영화를 개봉했더군요.

유명 배우를 주연으로 세우고,

아픈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영화로 그려냈습니다.

한참 화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된 부끄러움이 천천히 올라왔습니다.

‘그때 나는 왜 조금 더 진심으로 아이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했을까.’

축하 인사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저는 아직도 그 시절의 미안함 앞에 서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 제 앞에서 뮤지컬 대사를 읊는 아이를 보며 자꾸 다짐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꿈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고.

지금은 작고 서툴러 보여도 그 안에는 언젠가 스스로를 빛낼 거대한 세계가 숨어 있다고 믿어주자고 말입니다.


연극 동아리 학생 중에는

늘 자기 몸을 돌봐야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선생님 제자 중에 정말 멋진 영화감독이 있어.

몸이 약해 힘들었지만 자기만의 이야기를 끝까지 놓지 않았단다.

그래서 결국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만들게 되었어.

그러니까 너도 네 꿈으로 충분히 빛날 수 있어.”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도 저는

아이들의 꿈 앞에서

조금 더 조심스럽고,

조금 더 다정한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떨리는 첫 장면을

끝까지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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