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둥(Bildung)과 생(生)의 차이에 관하여
성장소설(독일어: bildungsroman 빌둥스로만은 어른이 되어가는 어린 주인공의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소설 장르로 독일의 교육개념인 빌둥의 관점을 담고있다. 더 나아가 이 장르는 몇 가지 형식과 주제들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현재 대표적으로 한국의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를 차지하고 있는 성장소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손원평의 아몬드이다. 이들은 너무나도 유명해서인지 이제는 클리셰처럼 느껴질만큼 익숙한 두 가지 성장 서사를 각각 가지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상징적인 은유를 통해 개인의 자아 성장을 현학적으로 나타난 작품이고 아몬드는 현대적인 관점으로 일상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청소년용 성장소설이다.
그럼에도 이들 성장 소설의 공통점은 바로 빌둥, 즉 계몽의 목표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 가르침을 주고 일깨워야 한다는 의식이 작품에 깊이 내재한다. 그래서 사실 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일반적으로 성장소설로 분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바카라 자체가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다른 작품들과 차별점을 가진다.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킬데어주에 있는 예수회 학교 클롱고우스 우드 칼리지에 다녔고, 이후 잠시 크리스천 브라더스가 운영하는 오코넬 학교에 재학했다. 아버지의 불안정한 경제 사정으로 인해 가정생활은 혼란스러웠지만, 조이스는 예수회 학교인 벨버디어 칼리지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1902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바로 그의 일생 중 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바로 여기까지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담긴 내용이다.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처럼 사춘기 소년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성적인 충동이나, 예술가 특유의 우울함은 비슷한 느낌을 주어 데미안과 다를 게 없다는 이미지를 주기 쉽지만 이 바카라은 디덜러스의 내면을 뻔한 상징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그러듯이 미묘한 우연적 사건들과 무의식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세계관이 얽혀 들어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마치 독백처럼 녹여내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롱고우스 우드 학교에 다닐 때부터 디덜러스는 시가 무엇인지 모를 때부터조차 시를 쓰고 싶어했다.
이런 점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 다운 칭얼거림 사이 사이에 심어지는 세계와 신에 대한 사유는 이미 디덜러스가 다른 아이들보다 독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의 사건들, 가령 이단적인 에세이를 써서 선생님께 걸린다던가, 테니슨보다 바이런 경(테니슨보다 바이런 경이 보다 격정적인 낭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함은 오래지 않아 아버지의 재산이 경매처분 당하는 시점부터 흐릿한 안개 속에 헤매기 시작한다. 학비 전액 면제의 특대생이자 학생 간부이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두려워했고 자기 삶의 추잡함을 상대로 싸우는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스티븐의 영혼 속에서는 차갑고 잔인하고 애정을 곁들이지 못한 잔인한 욕정만이 격동하고 있었다.
결국 가정 형편이 극단적으로 안 좋아진 스티븐내 가족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고 스티븐은 가족들 사이에서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 가족 공동체가 무너진 상태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졌고 그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들을 해소할 구석이 없던 스티븐은 사창가에 드나들게 된다.
사창가에 드나드는 스티븐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냉담해졌고 미사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자신의 욕정에 어린 행실에 대해서 속죄도 참회도 하지 않았다. 오만과 위구심에 거짓된 기도를 드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학교의 수호성인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추념하는 피정을 드리게 되었고 고해성사와 여러 차례에 거친 설교를 들은 끝에 결국 스티븐은 회개를 하게 되고 다시 종교적인 생활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기 시작한다.
어느 날은 성직자의 길을 교장 선생님께서 제안하시자 스티븐은 종교적 열정에 심취해있던 와중에도 그것을 결국 거절한다. 왜 그랬을까? 자신조차도 의문에 싸인 채, 스티븐은 자신의 이듬 디덜러스, 즉 다이달로스라는 그리스 신화의 밀랍 날개를 타고 하늘의 태양까지 날아올랐다가 밀랍이 녹아 추락하여 죽었다는 인물을 생각헌다. 자신의 이름이 잠시 있고 있었던 자신의 예술가적 주체적 자아를 예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티븐은 마치 시신이 수의를 떨쳐내듯이 자신의 새롭고 신비한 비상체를 빚어내기 위하여 소년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동안 자신을 억압했던 소년 시절의 유약함을 걷어냈다. 욕정적인 수치심과 그에 대한 중독에 더럽혀지고 어두워졌던 자신의 청소년기도 고된 고해성사와 피정을 통해 씻어냈다. 이제 정화되고 자유로워진 스티븐에게 이제 거칠 것은 없었다. 그렇게 스티븐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게 된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자극되고 그로 인해서 자아가 강제로 깨어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상징이나 현학적 은유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그러나 스티븐은 여성이나 친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침잠하여 자신의 영혼을 묵상한다.
스스로의 예술가적 외로움을 홀로 이겨낸다. 이 과정은 결코 교육적이지 않다. 스티븐은 기존에 자신을 보호했던 혹은 억압했던 가족 안의 도덕적 울타리, 종교, 이성 관계 등을 거쳐 스스로를 성장시키지만 마침내 이들을 모두 초월하여 스스로 인생을 판단할 만큼 완숙해진 순간 가감없이 둥지를 떠나 다이달로스처럼 비상하게 된다.
가톨릭 신자인데다가 시를 쓰고 비평을 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을 좋아하고 시인인 스티븐 디덜러스에게 나 또한 많이 공감하고 스스로를 투영해보기도 했다. 마치 평행세계에 내가 있다면 꼭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동시에 아직도 내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카라은 스스로를 대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만하고 흡사 자랑하는 듯한 자전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바카라은 다만 독자로 하여금 그동안 자신이 질문해보지 않았던 혹은 외면했었던 사실들을 마주하게 할 뿐이다. 판단은 그들의 몫이다. 새가 날개를 펼칠 때는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면서 가르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