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원래’는 대체 언제 만들어졌을까

자기이해와 자기규정 사이에서 놓치는 것들

by숨결biroso나


언제부터 과거의 나로
미래의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을까


“저는 그런 거 잘 못해요.”


누군가 여러 사람 앞에서 진행하는 일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거의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요.”

상대가 “해보면 잘할 것 같은데요”라고 한 번 더 권했지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거절하고 나니 마음도 편해졌다. 못할 것 같은 일을 굳이 해보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겼으니까.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정말 나와 맞지 않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나는 나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걸까.




자기이해가
자기한계가 되는 순간에 대하여


“나는 원래 그런 거 못해.”

이 말은 실패한 뒤보다 시작하기 전에 더 자주 나온다.


노래를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고, 숫자에 약하고, 낯선 곳을 싫어하고, 혼자서는 여행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금 궁금해졌다.

그 많은 ‘원래’는 대체 언제 만들어졌을까.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나일까. 아니면 몇 번의 경험을 오래 반복해 말하다가 어느 순간 ‘나’라고 믿게 된 것일까.우리는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확신 때문에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나를 가장 먼저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 대해서라면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취미를 물으면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음식 취향이나 좋아하는 색처럼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문제는 취향을 넘어 능력과 성격까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때 생긴다.


“나는 원래 소심해.”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난 끈기가 없는 사람이야.”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겁이 많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문장의 성격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경험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사람 자체에 대한 정의가 된다.


‘나는 그 일을 잘하지 못했다’가 ‘나는 그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가 되고,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했다’가 ‘나는 원래 말을 못한다’가 된다.


사건이 성격이 되고, 경험이 정체성이 된다.

그 순간부터 과거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미래의 예고편처럼 사용된다.


전에 못했으니 이번에도 못할 것이다. 한번 실패했으니 나와 맞지 않는 일이다. 예전에 상처받았으니 새로운 관계에서도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자기이해는 꽤 안전하다.

미리 포기하면 실패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뒤에 숨어 있는 오래된 기억

어떤 자기규정에는 시작점이 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렸는데 누군가 웃었을 수도 있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했을 때 “너는 숫자에 약하구나”라는 말을 들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다 말을 더듬었고, 친구들이 웃었던 기억 하나가 오래 남았을 수도 있다. 그런 사건 하나가 사람을 평생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사건보다 그 사건에 붙인 해석을 오래 가지고 산다.


시험 한 번을 망친 것은 사건이다.

‘나는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해석이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것은 사건이다.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다’라는 것은 해석이다.


사업에 실패한 것은 사건이지만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은 그 사건 이후 자신에게 붙인 문장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건보다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선택 앞에서 먼저 입을 연다.


하지 마.
너는 원래 못하잖아.

타인이 나를 함부로 규정하면 불쾌해하면서도, 나 자신에게 내린 판결에는 의외로 순순히 따른다. 남이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반박하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같은 말을 수십 년 동안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이해는 나를 가두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자신을 아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지치는지, 어떤 관계가 자신을 소모시키는지 알게 되면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고 무엇이든 도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 않는 것 역시 충분히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할 수 있지만 원하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서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이 말과 “나는 혼자서는 여행을 못해.”

라는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첫 번째 문장에는 선택이 있다.

두 번째 문장에는 판결이 있다.


“나는 많은 사람 앞에 서면 긴장해.”

와 “나는 발표 체질이 아니야.”도 다르다.


앞의 문장은 현재의 상태를 설명하지만, 뒤의 문장은 미래까지 결정한다. 우리가 자신을 설명할 때 어떤 문장을 사용하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말은 단지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때로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여러 명의 나로 살아간다

한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뜻밖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조용하던 사람이 어느 자리에서는 놀랄 만큼 말을 많이 하기도 한다. 결정을 못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위급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하기도 햐다. 늘 누군가에게 의지하던 사람이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생기자 예상하지 못했던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때 이런 말을 한다.

“너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그런데 어쩌면 당사자도 몰랐을 것이다.

그 모습을 꺼내야 할 상황이 이전에는 없었으니까.


사람의 성격을 한두 개의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바카라임져야 할 것이 생기면 달라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의 나와 경쟁해야 하는 자리의 나는 같지 않다.


과거에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이 지금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일리는 없다. 그것 역시 나 자신이다. 사람 안에는 이미 확인된 자신뿐 아니라 아직 사용할 일이 없었던 자신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를 찾는다는 말보다 궁금해한다는 말

우리는 흔히 ‘진짜 나를 찾는다’고 말한다.

그 표현에는 어딘가에 완성된 내가 숨어 있고,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하나의 완성품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스무 살에 좋아했던 일을 쉰 살에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중요했던 가치가 어느 순간 덜 중요해질 수도 있고, 젊을 때 관심 없던 것에 뒤늦게 마음이 갈 수도 있다.


그때마다 “내가 왜 변했지?”라고 걱정하기보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요즘 나는 무엇에 마음이 가는 사람이지?”

질문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진다.


정답을 찾으려 하면 과거의 나와 비교하게 되지만, 궁금해하기 시작하면 현재의 나를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소개서를 완성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계속 고쳐 쓰는 일에 가깝다.

지워진 문장이 있고, 새로 들어온 문장이 있으며, 한동안 중요했던 문단이 뒤로 밀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전의 문장이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절에는 그것도 나였으니까.




‘원래’ 대신 ‘지금까지’를 넣어보는 일

말 한마디를 바꾸어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생긴다.

“나는 원래 사람들 앞에서 말을 못해.”

대신,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어려웠어.” 라고 해보는 것이다.


“나는 원래 혼자 못해.”

대신, “나는 지금까지 혼자 해본 적이 별로 없어.” 라고 말한다. 아주 작은 차이인데 문장 뒤에 생기는 공간은 꽤 크다.‘원래’는 문을 닫지만 ‘지금까지’는 다음을 남겨둔다.


내일부터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평생 발표를 싫어해도 되고, 혼자 여행하지 않아도 된다. 숫자와 친해지지 않은 채 살아도 별문제 없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지 않아서 선택한 삶인지,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자기소개를 지금까지 따르고 있는 삶인지는 한 번쯤 구별해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라고 자주 말한다. 그런데 가장 오래 벗어나지 못하는 기대는 의외로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걸어놓은 기대일지도 모른다.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기대. 그것도 하나의 시선이다.




아직 모르는 내가 남아 있다는 것

어느 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고 스스로 놀라는 순간이 있다.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네.” 짧은 말이지만 생각해 보면 꽤 근사하다.

그동안 몰랐던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다. 늘 나였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내가 훨씬 많을 것이다.

가보지 않은 곳에서의 나,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 앞에서의 나, 겪어보지 않은 일을 통과한 뒤의 나.

그 모습을 지금 미리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자신을 완벽하게 모른다는 사실이 꼭 부족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아직 삶에 여백이 남아 있다는 뜻일 수 있다. 자신을 너무 빨리 완성하지 않는 것.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문장 끝에 마침표 하나를 덜 찍어두는 것. 그 작은 여백 때문에 내일의 내가 오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걸어갈 수도 있다.




자기이해는 삶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자신을 미리 제한하는 것은 다르다.

과거의 경험은 분명 나의 일부다. 다만 그 경험이 앞으로의 모든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해질수록 가끔은 그 확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말이 나를 이해하는 문장인지, 새로운 선택을 피하게 만드는 문장인지 구분해보는 것. 자기이해는 어쩌면 거기서 조금 더 깊어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라는 말 뒤에는 내가 살아본 나보다 살아보지 않은 내가 훨씬 많이 남아 있다.


오랫동안 자신을 설명해온 말에는 힘이 있다. 너무 익숙해서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오래 믿었다는 것과 지금도 사실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래서 다음에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말이 나오려 할 때는 조금 다르게 말해보면 어떨까.

“나는 지금까지 그랬어.”
겨우 한 단어가 달라졌을 뿐인데,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이 문장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누구나 나 자신을 알고 싶어한다. 다만 그 앎 때문에 아직 만나지 못한 나까지 미리 잃고 싶지는 않았으면 한다.

자기이해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결론보다, 달라지는 자신을 계속 관찰하는 과정에 가깝다.


누군가 나에 대해 물으면 우리는 몇 개의 단어를 골라 자신을 설명한다. 조용한 사람, 겁이 많은 사람, 낯을 가리는 사람, 혼자가 편한 사람.

그 말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몇 개의 단어가 나의 전부라고 믿지는 않았으면 한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서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일 수 있고, 아직 만나지 않은 누군가 앞에서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자신을 잘 모르는 날이 와도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평생 함께 살아온 나에게조차 아직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삶이 우리에게 끝까지 남겨두는 작은 비밀인지도 모르니까.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아직 살아보지 않은 가능성까지 결정할 필요는 없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다 알아냈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 나에게도 자리를 남겨두는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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