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든 작품을 읽고 그녀를 파해치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물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어?
이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 했다.
"특별히 용기를 낸 건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 거야."
질문에서 용기라는 단어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녀가 퇴사 한 것은 여기는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
에 대한 선택 같았다.
그녀는 퇴사에 대해 미련은 없었지만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훗날 자기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서야, 자신이 소유와 존재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나에겐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웠지만 그럼에도 고민은 있었다. 내가 뭘 고민하는지 정확히 모른 채 고민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을 뿐.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는 그간 내가 했던 고민이 소유와 존재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사이에서 갈피를 잡는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황보름, 『매일 읽겠습니다』
더 많이 갖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존재하는 삶.
연봉과 직함과 안정을 쌓아가는 삶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힘을 표현하며 사는 삶.
그렇게 보면 그녀의 퇴사는 탈출이 아니라, 이름 붙이지 못한 채 오래 품고 있던 질문이 마침내 몸을 움직인 결과에 가까웠다.
물론 홀가분하기만 했을 리는 없다. 훗날 유명해진 뒤 퇴사하고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퇴사하고 정말 기분 좋으셨죠? (…) 나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막 좋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미래가 막막했으니까요.
— 황보름, 『단순 생활자』
막막할 만도 했다.
그만둔 뒤에 무엇을 할지는 정해두지 않았으니까.
마음이 끌리는 대로 걷다 보면 여기다 싶은 곳이 나오지 않을까, 그 정도의 막연함이 전부였다.
그 막연함 속에서 몇 해가 흘렀다.
아직 글을 쓰기 전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 어디에도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영어학원 강사가 되어 있기도 했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여행사에 들어가 그 여행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때의 사건, 퇴사 후 황보름 작가의 삶의 모색기는 소설 『윗집부부』 속 인물 봄에게 그대로 옮겨져 봄의 퇴사 후 방황하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회사를 나온 후 봄은 방에서 뒹굴며 동시에 생각에서도 뒹굴었다. 앞으로의 삶, 그러니까 미래를 그려보려 했지만 잘되진 않았다. (…) 실은 자신이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도 잘 몰랐다.
— 황보름, 『윗집 부부』
글쓰기는 아버지의 여행사에 다니던 시절에 시작됐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새벽까지 썼다.
그 글이 처음 놓인 자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비공개 블로그였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썼고, 그저 글이 차곡차곡 쌓이는 기분이 좋아서 거의 매일 노트북 앞에 앉았다고 『매일 읽겠습니다』에서 회고한다.
비공개 블로그를 하나 만들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에 자유연상식으로 마음껏 글을 썼다. (…) 그저 글을 차곡차곡 쌓는 기분이 좋아서 퇴근 후엔 거의 매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 황보름, 『매일 읽겠습니다』
그렇게 은둔하듯 글을 쓰던 중 아버지가 여행사를 접었다.
그녀는 그길로 자기 방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글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시작한다.
첫 바카라은커녕 작가라 부를 만한 것도 없는 상태에서, 전업 작가와 다름없는 생활을 먼저 시작한 셈이다.
문예창작과를 나온 것도, 국문학이나 영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 같았다. 아빠가 여행사를 접은 동시에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둘 때처럼, 우선 쓰기 시작한 것이다.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것도 국문학이나 영문학이나 불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 (...) 내가 30대 초반이 끝날 무렵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 황보름, 『난생처음 킥복싱』
30대 초반이 끝나갈 무렵, 그저 이곳이 자기가 있어야 할 곳 같다는 느낌 하나로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우선 시작하고 본 것이다.
에세이 『난생처음 킥복싱』의 이 대목, 우선 해 본다는 태도는 『윗집 부부』에서 한결 또렷한 말로, 같은 결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이렇게 우하향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개인이 같이 우하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개인들은 이상이라는 날개를 달고 우상향을 사는 거죠. (…) 희망이 없어도 뭐든 해보는 게 제가 생각하는 긍정이에요.
— 황보름, 『윗집 부부』
그 시절의 그녀도 이런 긍정으로 버텼을 것이다.
작가는 어렵다고, 밥벌이도 안 된다고 세상이 아무리 우하향을 외쳐도, 이상을 품고 뭐든 해보는 삶.
그녀가 걸어온 길이 이 문장을 그렇게 읽게 만든다.
그 시절, 글쓰기와 동거동락했던 생활의 기쁨을 그녀는 『단순 생활자』에 이렇게 기록한다.
하루 종일 문장을 고민하다 침대에 누우면 그날 하루가 더없이 의미 있게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온통 문장으로 가득 찬 것이 좋았고, 또 좋은 문장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좋았다.
— 황보름, 『단순 생활자』
내면의 기쁨과 충만함으로 글쓰기와 동거동락의 생활을 이어가며, 2017년 가을, 첫 에세이 『매일 읽겠습니다』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020년『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와 『난생처음 킥복싱』이 뒤를 이어 출판하게 되었다.
다만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것은,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는 것을 점점 체감하게 된다.
글은 본업이었지만 밥벌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밥벌이의 어려움을 작가 생활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였다.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을 하늘 탓할 수 없듯, 작가가 되어 생활이 곤궁해진 것을 따지고 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쓰는 삶을 계속했다.
이 담담한 낙관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채로.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왜 날리느냐 하늘을 원망할 필요 없듯, 작가가 되면 밥벌이가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인데 왜 생활이 이토록 곤궁해진 것이냐 꼬치꼬치 따지고 들 필요 없는 것이다. (…) 밥벌이가 어려우면 소식을 하면 된다.
— 황보름, 『단순 생활자』
황보름 작가는 자신의 몸은 사실 오래전부터 고장 나 있었다고 말한다.
대학 휴학 시절 버거킹에서 하루 여덟 시간씩 서서 일하다 허리를 다쳤다.
"허리만 망가지지 않았다면 햄버거 장인을 꿈꿨을 것"이라는 능청은, 그녀의 문장이 아픔을 다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20대에는 검사란 검사를 다 받아도 원인을 찾지 못한 무릎 통증과 다이어트 강박이 뒤를 이었다.
체력이 없어서 체력을 키울 수 없던 사람.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킥복싱 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 운동은 왜 하시려는 거예요? 나는 지난 몇 년의 설움을 토해내듯 대답했다. 체력이 너무 안 좋아서요.
— 황보름, 『난생처음 킥복싱』
그런 그녀가 어느 겨울의 끝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킥복싱 체육관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시작된 킥복싱은 한 권의 에세이가 되었고, 배우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생각들은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비춰 보기에 딱 좋다.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100점에 필요한 노력이 자기 한계를 넘으면 깨끗이 포기하고, 85점을 최선으로 받아들여 온 사람이었다.
몸을 바꾸는 일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
노력은 하되 너무 많이 하지는 않는 것, 딱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
그만두지 않을 만큼의 느슨한 노력이었다.
노력은 하지만 너무 많이 하진 않는다. (…) 할 수 있는 만큼만, 딱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하면서 살고 싶다.
— 황보름, 『난생처음 킥복싱』
1월 2일에 체육관 문을 두드린 사람이 12월 30일에도 체육관에 있었다.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다.
그리고 한 해의 끝에서 그녀는 몸을 보는 기준이 옮겨 간 것을 발견한다.
아름다움에서 멋짐으로.
아름다움의 반대편엔 아름답지 않음이 아니라 멋짐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12kg 케틀벨을 들고 스윙을 하는 몸은 멋있다. 아름다움에 갇히지 않은 몸은 멋있다. 하루를 거뜬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건강한 몸은 멋있다. 그러므로, 내 몸은 멋있다.
— 황보름, 『난생처음 킥복싱』
이때 체육관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소설 『윗집 부부』에서 많은 독자들이 좋은 문장으로 꼽은 대목에 철봉 턱걸이 비유가 있다.
턱걸이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팔 힘은 점점 빠지고 몸은 부들부들 떨리는데 끝까지 끝까지 버티는 거예요. 사실 지금도 턱걸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버티려는 거니까 봄은 철봉에 턱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 황보름, 『윗집부부』
턱걸이를 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이 말을 들은 인물은, 철봉에 턱을 걸어 보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재미있는 것은 이 턱걸이가 킥복싱 도장에서의 경험과 겹친다는 점이다.
철봉에 매달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턱걸이를 시도하는 몸은 멋있다.
— 황보름, 『난생처음 킥복싱』
글은 경험에서 나온다는 말이 이런 것인가 보다.
그리고 체육관 문을 두드린 2019년은, 한 해 전 써둔 소설을 온라인카지노에 연재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 동안, 소설도 조용히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 다음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고 그 작가의 작품 세계 깊숙이 들어가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쓰고 있는 글은 황보름 작가의 삶을
읽다 → 견디다 → 쓰다 → 단련하다 → 멈추다 → 다시 시작하다 → 살아가다
이렇게 크게 구분하여 집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다 → 견디다 → 쓰다 → 단련하다'까지 집필했습니다.
다음 글은 '멈추다'부터 이어가려 합니다.
사실...
이번에 황보름 작가를 모시고 온라인 북토크를 진행합니다.
북토크를 통해 더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 위해 이렇게 글로 정리해보고 있습니다.
혹시 그녀의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듣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온라인 북토크에 신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www.moonjangsai.com/book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