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20자

왜 굳이 포기하니?

byGiagraphy
1부. 남들의 첫 번째 질문. 중국에서 유학했다고?


春眠不觉晓
处处闻啼鸟
夜来风雨声
花落知多少


고등학교 1학년, 중국어 시간. 선생님은 춘효(春晓)라는 20자의 한시를 보여주며 외울 수 있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중국 초등학생들이 외우는 한시였는데, 다들 자신 없어하자 선생님은 20분을 줄 테니 외워보라고, 이게 수행평가라고 했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한번 도전해 볼까? 하고 자신 없이 손을 들고 나섰는데, 의외로 20자의 병음이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선생님도 놀라고 반 친구들도 놀랐다.

물론, 나도 놀랐다.


초등학생 때, 한창 유행하던 〈황제의 딸〉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자주 나오는 단어를 자막을 보고 유추해 따라 하던 나였다. 내가 외운 단어를 배우가 말하고, 내가 외운 뜻의 자막이 맞아떨어질 때 희열을 느꼈다. 언어에 재능이 있다까진 아니어도, 내가 외국어를 꽤나 좋아하고 즐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 친구들 앞에서 20자의 한시를 완벽하게 외워냈던 날 깨달았다.

아, 나 재능이 있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원래는 좋아만 했던 중국어가 너무 재밌어졌다. 재미가 붙으니 나름 외국어 좀 한다는 애들이 모인 외국어고등학교의 중국어과 70명 학생들 사이에서 다른 건 몰라도 중국어만큼은 항상 1등이었다.

1년 내내 중국어는 1등이던 나를 눈여겨보던 원어민 선생님은 내가 2학년이 되던 해에 이렇게 말했다.

“너는 중국 대학에 가서 중국어 교수를 하면 좋겠다.”

선생님은 그저 지나가며 한 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게 내 마음에 그대로 꽂혔다.


한국외대.

외국어를 좋아하던 내가 중학교 때부터 꾸던 꿈이었다. 한국의 다른 대학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중국 대학을? 너무 생경한 그림이었다.


그날 밤, 인터넷으로 중국 대학들을 찾아봤다. 북경대, 복단대, 청화대… 생소한 이름들이었지만 세계에서 입지는 서울대보다 높았다. 이상하게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외대에 가서 중국어를 배우는 것과 중국에 가서 중국어로 다른 무언가를 배우는 것. 내 마음은 후자에 기울었다. 단단했던 나의 목표가 말랑해졌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나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방학 동안 천진의 한 대학교에 1개월 단기 연수를 다녀왔다. 정작 배운 내용은 중국어 기초였지만, 한 달을 중국에서 ‘살아보는’ 경험이 메인이었다.

“나이차띠엔 짜이 날?” (밀크티 가게 어디예요?)
“쩌거빠오즈 뚜오샤오치엔?” (이 빠오즈 얼마예요?)

내가 알아듣기엔 빠른 속도로 답변이 돌아왔지만, 뉘앙스와 손짓, 중간중간 귀에 들어오는 단어들로 충분히 답이 됐다. 교실에서 배운 중국어가 진짜 통하는 순간이었다. 드라마를 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 중국어로도 살 수 있겠구나.


그렇게 내가 새로운 목표를 굳혀갈 때, 한창 수시 준비에 열을 올리던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웬 중국? 한국에서 대학 레벨 올리는 게 더 낫지 않나?”
“아니, 중국에는 서울대보다 세계 랭킹 높은 학교가 더 많다니까?”

담임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네 성적으로 인서울은 충분히 가능한데 왜 굳이 포기하니?”

친구들에겐 강하게 반박했지만, 어쩐지 선생님 앞에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만 되뇌었다.

'복단대가 인서울보다 더 좋은 학교인데, 왜 다들 인서울만 생각하지?'

억울했고, 오기가 생겼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더 잘되면 되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안전한 길을 두고 괜한 모험을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엄마는 흔들리고 고민하는 나를 보고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그래도 내 편이 한 명은 있으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 무렵,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이라는 바카라을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 참 작지? 그러니까 세계를 무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
우리나라는 너의 주무대가 아니라 베이스캠프일 뿐이야.”


초등학교 때 수도 없이 봐온 슬롯과부도의 세계지도에선 왜 느끼지 못했을까.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 내 무대는 더 이상 한국이 아니구나.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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