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1부. 남들의 첫 번째 질문. 중국에서 유학했다고?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대낮같이 밝은 달아 (덩덕 쿵덕쿵)
어둠 속의 불빛이 우리네를 비춰주네!”
사물놀이 ‘별달거리’에서 나오는 구호. 아직도 머릿속에 떠올리면 바로 오디오가 함께 재생되는 구절이다.
어릴 때부터 대학 생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바로 동아리.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입학금도 내기 전에 교내 한국인 유학생 홈페이지부터 들어가 봤다. 그중 내 눈에 들어온 건 풍물패였다. 원래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해외에서 한국의 국악을 한다고 하니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모임은 곧 철거를 앞둔 낡은 강의실 건물에서 열렸다. 건물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이미 악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의실 안의 바카라상과 의자는 모두 벽 쪽으로 밀려 있었고, 타일 바닥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고 다들 바닥에 앉아 악기를 쳤다.
첫날은 바카라상 위에 앉아 구경만 했는데, 재밌어 보이긴 했으나 귀가 아픈 게 사실 제일 컸다. 신입이 귀했는지, 선배들은 연습하면서도 앞다투어 나를 챙겨주었다. 어떤 악기를 하고 싶냐는 말에 내가 망설이자, 덩치도 좋고(?) 힘도 좋아 보이니(??) 북을 쳐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물 흐르듯 풍물패의 일원이 되었다.
상해 유일의 풍물패였던 우리는 늘 여러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을 했다. 공연복을 입고 오색띠를 메는 순간, 우리의 국위선양이 시작됐다. 멤버들과 눈을 맞추며 합을 맞추다 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악기를 내려놓는 순간 환호하는 무대 아래의 관객들이 보였다.
나는 사물놀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내가 2학년 때, 학교에서 큰 규모의 문화제가 열렸다. 나라별로 대표 공연을 하나씩 올렸고, 우리는 당연히 한국 대표였다. 공교롭게도 바로 앞 순서는 북한의 중창단이었다.
학교에서 종종 북한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그들 곁엔 늘 경호원이 붙어 있었다. 경호원이라기보다는 감시자에 가까웠다. 무대 뒤까지는 경호원들이 따라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기하던 그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우리 악기에 머물렀다.
"장구네요."
먼저 말을 건넨 건 그들이었다. 그게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 사람과 나눈 대화였다. 하지만 이렇게 대화할 거라 생각도 못 했을뿐더러 곁에 경호원이 없는데도 자꾸 눈치가 보여, 여러 문장들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로 내려오자, 그들은 너무 멋졌다며 울먹이는 눈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같은 말을 쓰는데,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눌 수 없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찡했다.
나는 사물놀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렇게 2년, 꼬래비 북을 맡았던 나는 이제 사물놀이 전체를 이끄는 꽹과리를 잡았다. 내가 감히 쇠를 맡아도 되나 싶었지만, 선배들의 응원에 서툴러도 해보기로 했다. 그사이 연습하던 강의실이 철거되면서 우리는 학교 운동장을 전전했다. 주민들의 신고로 꽁안(公安, 중국 경찰)이 찾아올 때도 있었고, 대자보에 가까운 장문의 경고장을 보내는 중국인도, 낡고 시끄러운 관습으로 치부하는 한국인도 있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연습을 멈추진 못했다.
어느새 나는 풍물패의 장을 맡고 있었고, 그해는 마침 동아리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늘 초청받아 공연만 해왔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공연을 기획해 보자고 부원들을 선동했다. 보통 초청 공연은 한두 곡 정도로 공연 시간이 길어도 20분이 안 되는데, 내가 준비하는 것은 한 시간을 꽉 채우는 말 그대로 연주회였다. 제목은 〈樂, 10년과의 소통〉. 프로그램 구성을 짜고, 연주곡별 멤버를 구성하고, 포스터와 티켓까지 자체 제작했다. 기존에 연습하던 곡들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예전에 재밌게 봤던 〈난타〉를 본뜬 무대나 개인적으로 전수관에서 배워온 가락도 끼워 넣었다.
부원들의 얼굴엔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의심과 불안이 가득했다. 15년이 넘은 지금도 기억하는 그 이름, 러시아의 역도선수 바실리 알렉세예프. 실제 무게보다 가볍다고 믿고 세계 신기록을 깨버렸다는 그의 일화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부원들에게 얘기했다. “가능하다 여기면 가능하다”고, 새벽 3시가 넘어도 집에 보내주지 않으면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나는 하면 된다고, 더 몰아붙였다. 그땐 '이렇게까지'라는 말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후배 하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난 언니가 너무너무 싫었어”라고 말한다.
나는 공연 홍보글 맨 끝에 한비야 작가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적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가슴이 뜨거워서 하는 일.
지금 생각하면 나 혼자 뜨거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땐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었고, 후배들의 응석에도 꿋꿋이 연습을 이어나갔다.
한 시간의 공연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마무리를 위해 부원 모두가 길게 한 줄로 서서 악기를 치며 입장하던 순간이다. 그 줄 맨 앞에서 멤버들을 이끌며 꽹과리를 치는데, 지난 넉 달이 한꺼번에 스쳐 갔다.
‘전틀러’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아이들을 몰아붙이며 혼자 속으로 앓아온 시간들.
힘들었을 텐데도 화도 적당히(?) 내 가며 끝까지 따라와 준 부원들.
어딘가 어설펐을 긴 시간의 공연을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 준 친구들.
한국의 사절단이 되어 외국인 유학생들과 중국 교수님, 학우들의 기억에 남았을 거라는 뿌듯함.
모든 것을 태워 준비한 탓에 공연비로 늘 넉넉했던 회비도 땡전 한 푼 남지 않았다. 졸업한 선배들이 고맙다고 도와준 덕에 겨우 뒤풀이도 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먹고 싶은 걸 마음껏 시켜 먹는 회식도 아니었고, 부원들은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며 나에게 질타를 쏟아부었지만, 그런 말과 달리 얼굴마다 성취감과 뿌듯함이 묻어났다. 그 자리는 눈물 섞인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공연이 주는 도파민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 합이 잘 맞았던 친구들을 꼬셔 졸업 후 악기를 들고 유럽 여행을 가자며 계획했다. 도시마다 거리 공연을 하며 한 달을 여행하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멤버 한 명이 갑작스러운 국가의 부름으로 무산되었지만. 악기를 메고 외국의 낯선 거리에 서 보겠다는 꿈은 아쉽지만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졸업 후 진로도 공연 마케팅으로 정했다. 내가 퍼포머가 되지 못한다면, 10주년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리딩한 경험을 발판 삼아 공연자들을 돕고 싶었다. 관련 도서를 찾다가 〈난타〉의 제작자인 배우 송승환이 쓴 바카라을 보게 되었다. 〈난타〉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시작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고, 아시아 공연 최초로 뉴욕에 전용관을 열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며 다짐했다.
50세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한국 공연 전용 극장을 세워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이바지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