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돌려줄 게 있어서

by시노


준석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태규는 바카라상 위에 놓인 상자를 보고 있었다.

“뭐래요?”

“안 된대.”

“돈이요?”

“어.”

태규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부품은 며칠 전 그대로였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라고 하시죠.”

“가져가서 뭐 하게.”

“자기네가 번호를 잘못 알려준 거잖아요.”

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얘기해보면 안 됩니까?”

“방금 했어. 현장에선 자기들 잘못이라고 하는데, 구매 쪽에선 결재 못 올린대.”

“그럼 그냥 끝이에요?”

준석이 태규를 봤다.

“네가 보탠 돈은 내가 줄게.”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준석은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영업부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났다.

“김 대리!”

“예, 갑니다!”

준석이 태규에게 말했다.

“일단 갖고 있어. 내가 다시 얘기해볼 테니까.”

그가 돌아서자 태규가 물었다.

“언제요?”

준석은 걸음을 멈췄다.

“연락해보고.”

태규는 상자를 닫았다. 서랍에 넣으려다가 바카라상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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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재민에게 전화가 왔다.

“야, 내일 나오지?”

“어딜?”

“상훈이 밥 사는 날이잖아.”

“아, 맞다.”

“너 또 까먹었냐?”

태규가 달력을 봤다.

“여섯 시?”

“어. 늦지 마.”

“알았어.”

“이번엔 진짜 밥만 먹는다.”

“그 말 지난번에도 했거든.”

재민이 웃었다.

“내일 봐.”

수화기를 내려놓자 김 주임이 물었다.

“내일 약속 있어?”

“대학 친구들이요.”

“좋겠네.”

김 주임은 서류철을 닫았다.

“난 내일도 나와야 되는데.”

“지난주에도 나오셨잖아요.”

“월요일 아침에 과장님이 보자시네. 자료가 안 끝났어.”

태규는 주임의 바카라상에 쌓인 서류를 봤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됐어. 네 것도 많잖아.”

김 주임이 서류철을 들고 일어났다.

태규는 퇴근 전에 바카라상 위를 정리했다. 잘못 산 부품 상자는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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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식당 안쪽에서 재민이 손을 흔들었다.

“야, 여기!”

태규가 다가가자 상훈이 일어났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그럭저럭. 앉아.”

맞은편에는 유진이 있었다.

태규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재민이 빈 의자를 발로 밀었다.

“빨리 앉아. 배고파.”

“먼저 먹지 그랬어.”

“상훈이가 너 기다리자잖아.”

상훈이 메뉴판을 태규에게 내밀었다.

“먹고 싶은 거 골라.”

“네가 산다며.”

“그러니까 골라.”

태규가 메뉴판을 펼치자 재민이 옆에서 들여다봤다.

“그거 말고.”

태규가 메뉴판을 덮었다.

“네가 골라.”

유진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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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다음 주까지만 지금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새로 가는 데는 어때?”

태규가 물었다.

“가봐야 알지. 석 달은 수습이래.”

재민이 물잔을 들었다.

“그래도 월급은 더 준다며.”

“수습 끝나면.”

“그럼 석 달만 버티면 되네.”

상훈이 재민을 봤다.

“네가 한번 버텨봐.”

재민이 잔을 내려놓았다.

“난 지금도 버티고 있어.”

다들 웃었다.

상훈은 웃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 회사에선 나가는 날까지 인수인계 다 해놓고 가래. 사람은 안 뽑으면서.”

태규가 물었다.

“그럼 누구한테 넘기는데?”

“옆자리 대리한테.”

“그분 일도 많잖아.”

“그러니까.”

상훈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유진이 물었다.

“새 회사는 집에서 멀어요?”

“버스로 한 시간쯤요.”

“지금이랑 비슷하네요.”

“네. 버스만 안 놓치면요.”

음식이 나오자 재민이 수저를 집었다.

“자, 일단 먹자. 오늘 상훈이가 쏘는 거니까.”

“비싼 건 추가하지 마.”

상훈이 말하자 재민은 이미 종업원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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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재민이 담배를 꺼냈다.

“한잔 더 할 사람?”

상훈이 손을 들었다.

태규는 외투를 입었다.

“난 간다.”

“벌써?”

“밥만 먹는다며.”

“그랬지.”

재민이 유진을 봤다.

“유진 씨는요?”

“저도 가볼게요.”

“다들 너무하네.”

상훈이 재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 있잖아.”

“너랑 둘이 뭘 해.”

“그럼 나도 간다?”

재민이 상훈의 팔을 붙잡았다.

태규는 웃으며 손을 들었다.

“잘 먹었다.”

상훈이 말했다.

“다음엔 네가 사.”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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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태규는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유진이 물었다.

“회사 일은 좀 어떠세요?”

“그냥 다니죠.”

“많이 바쁘세요?”

“요즘은 좀요.”

태규는 말을 마치고 도로 쪽을 봤다.

유진은 더 묻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자 두 사람은 길을 건넜다.

“저희 회사는 금요일에 한바탕했어요.”

유진이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거래처에서 수량을 바꿨대요. 우리는 처음 주문한 것만 가지고 있었고요.”

“연락이 안 왔어요?”

“보냈다는데 없더라고요. 나중에 찾았어요. 다른 서류 밑에서.”

“그럼 해결된 거네요.”

“네. 그걸 찾느라 퇴근을 못 했죠.”

태규가 웃었다.

“저희도 그런 일 많아요.”

“아까는 그냥 다닌다면서요.”

“그냥 다니면서 그런 일도 하고요.”

유진이 웃었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태규가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아, 맞다.”

검은 볼펜을 꺼내 건넸다.

“지난번에 빌린 거요.”

“아.”

유진이 받아 가방에 넣었다.

“잘 쓰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유진이 노선 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태규 쪽을 봤다.

“다음 주 토요일에도 쉬세요?”

“아마요. 왜요?”

“재민 씨가 영화 보자고 했거든요. 상훈 씨랑 다 같이.”

“저한텐 얘기 안 했는데요.”

“아직 안 했나 봐요.”

“유진 씨도 오세요?”

“네.”

태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가볼게요.”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시잖아요.”

“재민이한테 물어보죠, 뭐.”

유진이 웃었다.

“그럼 다음 주에 봬요.”

버스가 들어왔다.

태규는 한 걸음 비켜섰다.

“네. 들어가세요.”

유진은 버스에 올랐다. 태규는 자기 버스가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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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준석은 출근하자마자 영업 일정표를 펼쳤다.

전날까지 확인해주기로 했던 납기 두 건이 표시돼 있었다.

준석은 공장에 전화를 걸었다.

“어제 말씀드린 출하 건이요. 오늘 나갈 수 있습니까?”

상대가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준석은 수화기를 든 채 달력을 넘겼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잠시 뒤 대답이 돌아왔다.

“오후요? 거래처에는 오전에 확인해드린다고 했는데.”

준석이 시계를 봤다.

여덟 시 오십 분이었다.

“그럼 확인되는 대로 바로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다른 수화기가 울렸다.

준석이 받았다.

“네, 김준석입니다.”

지난번 부품을 구해줬던 거래처 담당자였다.

“아, 예. 안녕하세요.”

준석은 상대의 말을 듣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건 결국 처리가 안 되는 겁니까?”

상대가 미안하다고 했다.

준석은 한동안 듣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려는데 상대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제 번호를 알려주셨다고요?”

준석이 의자를 당겼다.

“어디에요?”

상대는 아는 공장에서 급하게 부품을 찾는다기에 준석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아니, 제가 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닌데…….”

상대가 웃으며 몇 마디 덧붙였다.

준석은 더 설명하지 못했다.

“네. 전화 오면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거래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도중, 공장에서 전화가 왔다.

준석은 걸던 전화를 끊고 공장 전화를 받았다.

“네. 확인됐습니까?”

오후 출하가 가능하다는 답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거래처에 연락하겠습니다.”

그때 또 전화가 울렸다.

준석이 받았다.

“네, 김준석입니다.”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였다.

“소개받고 전화드렸는데요.”

상대가 회사 이름을 말했다.

준석은 조금 전 들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아, 네.”

“부품 하나 때문에 그러는데,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준석은 시계를 봤다.

아홉 시가 막 지났다.

“말씀하세요.”

상대가 품목과 규격을 불렀다. 준석은 메모지를 찾아 숫자를 적었다.

“잠깐만요. 뒤에 번호 다시 한번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때 옆자리 전화가 울렸다.

최대리가 받았다.

“네, 영업부입니다.”

잠시 듣던 최대리가 준석을 불렀다.

“김 대리.”

준석이 손으로 잠깐 기다려달라는 표시를 했다.

최대리가 수화기를 막았다.

“네 거래처야. 납기 확인해준다던 데.”

준석은 자기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후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무언가 더 물었다.

“네, 번호는 적었습니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최대리에게서 수화기를 받았다.

“네, 김준석입니다.”

상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김 대리님, 아홉 시까지 알려주신다면서요. 저희 생산팀이 기다리고 있어요.”

준석은 시계를 봤다.

아홉 시 십 분이었다.

“죄송합니다. 방금 공장 확인을 받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출하된답니다.”

“오후요? 오전에 들어올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럼 진작 말씀을 주셨어야죠. 다른 데 알아볼 시간이라도 있게.”

준석은 펜을 쥔 손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제가 확인이 늦었습니다.”

상대는 생산팀과 상의해보고 다시 전화하겠다며 끊었다.

준석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최대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납기가 밀렸습니다.”

“그건 공장 문제고. 왜 네가 연락을 안 했냐고.”

준석은 일정표를 봤다.

“확인되는 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확인 안 됐으면 안 됐다고 먼저 얘길 했어야지.”

최대리는 자기 바카라상에서 서류철을 집었다.

“거기 아침부터 두 번 전화했어. 네가 계속 통화 중이라 내가 받았고.”

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단 가서 얘기해. 전화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예.”

준석이 가방을 집었다.

그가 영업부 문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다시 울렸다.

최대리가 받았다.

“네, 영업부입니다.”

“김준석 대리님 좀 부탁드립니다.”

“방금 나갔는데요.”

“아까 통화하다 끊겨서요. 부품 때문에 전화드렸는데.”

최대리가 문 쪽을 봤다.

“부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