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울렸다.
태규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자재과입니다.”
— 서태규 씨?
“네.”
— 베어링 하나 물어보려고.
태규는 서랍을 열었다.
“규격이 어떻게 됩니까?”
상대가 숫자를 불렀다.
태규가 수첩을 넘겼다.
“6204요?”
— 어.
“잠시만요.”
손가락이 한 줄에서 멈췄다.
“여기 한번 물어보세요.”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지난번엔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르고요.”
— 알았어.
전화가 끊겼다.
마침 자재과를 지나던 준석이 문 앞에서 멈췄다.
“누구야?”
“한주 사장님이요.”
“또?”
태규가 수첩을 덮었다.
“그러게요.”
준석이 들어와 바카라상에 손을 짚었다.
“요즘 너한테 많이 물어본다?”
“몇 번 왔습니다.”
“돈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태규가 준석을 봤다.
“전화번호 알려주고요?”
준석이 웃었다.
“그렇긴 하네.”
영업부 쪽에서 누군가 준석을 불렀다.
“김 대리!”
“예!”
준석은 바로 돌아섰다.
수첩에 전화번호가 늘었다.
어떤 번호 옆에는 동그라미가 생겼고, 어떤 번호에는 줄이 그어졌다.
있음
없음
준석이 가져오는 쪽지도 늘었다.
그날 오후에도 준석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바빠?”
태규가 발주서를 내려놓았다.
“왜요?”
“이거.”
태규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품목과 숫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어디 거예요?”
“어제 갔던 데.”
태규가 숫자를 다시 봤다.
“본 것 같은데.”
“있어?”
“전화해봐야죠.”
준석이 바카라상 위 전화기를 봤다.
“지금 하면 안 돼?”
태규가 사무실 안쪽을 한번 봤다.
“퇴근하고 할게요.”
준석도 그쪽을 봤다.
김 주임이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그래.”
준석은 쪽지를 놓고 나갔다.
퇴근 후 태규는 회사 앞 공중전화로 갔다.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눌렀다.
“사장님, 저 서태규인데요.”
— 어.
“전에 그 규격 있지 않았습니까?”
— 뭐?
태규가 종이에 적힌 숫자를 읽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뭔가 뒤지는 소리가 났다.
— 몇 개?
“하나요.”
— 있어.
“얼맙니까?”
태규가 받아 적었다.
“내일 가도 되죠?”
— 와요.
태규가 끊으려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
— 왜.
“이거 규격만 맞으면 되는 겁니까?”
— 어디 쓰는데?
태규가 종이를 뒤집어봤다.
“그건 안 적혀 있는데요.”
— 기계가 뭔데.
“모릅니다.”
— 그럼 물어보고 와.
전화가 끊겼다.
태규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잠깐 서 있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태규가 얼른 수화기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종이 뒷면에 짧게 적었다.
기계?
펜을 넣으려다 한번 봤다.
검은 볼펜이었다.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준석이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
“어제 그거요.”
잠시 들었다.
“네. 그거.”
준석이 펜을 들었다.
“어디 들어갑니까?”
상대가 대답했다.
“그거 말고요. 기계 형식 같은 거.”
다시 들었다.
“현장에 물어봐야 돼요?”
준석이 시계를 봤다.
“네. 한번만 봐주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옆자리 최대리가 물었다.
“뭐 찾냐?”
“예?”
“아까부터 뭘 그렇게 물어.”
“거래처에서 뭐 좀 구해달래서요.”
“우리 거?”
준석의 손이 멈췄다.
“아뇨.”
최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근데 네가 왜?”
준석이 대답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김준석입니다.”
최대리는 잠깐 쳐다보다 자기 서류로 돌아갔다.
준석이 숫자를 받아 적었다.
“뒤에까지요?”
한 번 더 적었다.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메모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 저녁 준석은 혼자 한주에 들렀다.
가게 사장이 종이를 받아봤다.
“이거?”
“네.”
“잠깐.”
선반에서 상자를 하나 내렸다.
물건에 찍힌 번호를 읽고 종이와 맞춰봤다.
“맞네.”
준석이 받아 들었다.
“이거면 돼요?”
사장이 준석을 봤다.
“적어온 게 이거잖아.”
“그렇긴 한데.”
“또 뭐 있어?”
준석이 물건을 한번 뒤집었다.
“아닙니다.”
지갑을 꺼냈다.
다음 날 오후.
영업부 전화가 울렸다.
“네, 김준석입니다.”
몇 마디 듣던 준석이 펜을 내려놓았다.
“네?”
잠시 들었다.
“안 맞아요?”
최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어제 그 번호로—”
준석이 입을 다물었다.
“네. 네.”
바카라상 위 메모를 끌어당겼다.
“잠깐만요. 지금 현장에 계세요?”
다시 상대의 말을 들었다.
“아, 아닙니까?”
준석이 이마를 문질렀다.
“알겠습니다. 제가 갈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최대리가 물었다.
“뭐 잘못 나갔어?”
“아뇨.”
“근데?”
준석이 메모를 집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최대리가 준석을 쳐다봤다.
“김 대리.”
준석이 돌아봤다.
“예.”
“네 거래처 먼저 챙겨.”
준석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예.”
그대로 나갔다.
공장 안쪽에서 기계 한 대가 멈춰 있었다.
준석은 구매 담당자를 따라 현장으로 들어갔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부품을 들고 있었다.
준석이 물었다.
“이 번호 누가 불러주셨어요?”
담당자가 남자를 봤다.
“박 기사 아니었어?”
“제가요?”
“어제 전화 왔을 때.”
남자가 부품을 뒤집었다.
“아, 이거.”
준석이 메모를 내밀었다.
남자가 숫자를 읽었다.
기계 쪽을 한번 보더니 가까이 갔다.
붙어 있는 표기를 확인했다.
“어?”
담당자가 물었다.
“왜.”
“뒤에 하나가 다르네.”
담당자가 종이를 가져갔다.
“이거 아니잖아.”
“어제는 이건 줄 알았지.”
“네가 불러준 거잖아.”
남자가 다시 표기를 봤다.
“내가 잘못 봤나 보다.”
담당자가 한숨을 쉬었다.
“아, 참…….”
준석이 펜을 꺼냈다.
“맞는 거 불러주세요.”
남자가 숫자를 읽었다.
준석이 적었다.
마지막 한 자리가 달랐다.
담당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김 대리.”
준석은 종이를 접었다.
“일단 다시 구해볼게요.”
다음 날 저녁.
태규와 준석이 한주로 갔다.
가게 사장은 상자부터 열었다.
물건을 꺼내 돌려봤다.
“이거 끼웠네.”
준석이 말했다.
“안 맞아서 바로 뺐답니다.”
“그래도 안 돼.”
태규가 물었다.
“다른 걸로 바꾸는 건요?”
“뭘로.”
태규가 새로 받아온 번호를 불렀다.
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누가 가져가.”
“사장님, 한번만—”
사장이 태규를 봤다.
“내가 다른 거 줬어?”
태규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잖아.”
준석이 물었다.
“그럼 방법 없습니까?”
“없어.”
사장은 물건을 상자에 넣어 앞으로 밀었다.
“다음엔 기계부터 보고 와.”
준석이 상자를 들었다.
골목 끝에서 준석이 멈췄다.
“새로 사야겠네.”
“네.”
“내일 가져가면 늦나?”
태규가 준석을 봤다.
“기계 서 있다면서요.”
준석이 지갑을 꺼냈다.
돈을 세었다.
옆 칸을 열었다.
접어둔 지폐 몇 장까지 꺼냈다.
다시 세었다.
태규가 물었다.
“모자라요?”
“됐어.”
태규도 지갑을 꺼냈다.
“얼마요?”
“넣어둬.”
“얼마 모자라냐고요.”
준석이 금액을 말했다.
태규가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내가 살게.”
“같이 했잖아요.”
준석이 태규를 봤다.
태규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준석이 결국 돈을 받았다.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무슨 딴소리요.”
준석이 먼저 걸었다.
“몰라. 가자.”
새 물건은 맞았다.
기계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뒤 준석은 담당자와 사무실로 올라왔다.
담당자가 먼저 말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먼저 산 건?”
“안 된대요.”
“얼마였죠?”
준석이 금액을 말했다.
담당자가 혀를 찼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해볼게요.”
준석이 물었다.
“어떻게요?”
“경비로 올려보든가.”
“됩니까?”
담당자가 대답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잠깐만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준석은 앞에 서서 기다렸다.
담당자의 통화가 길어졌다.
준석이 시계를 봤다.
가방을 들었다.
담당자가 통화하면서 손을 들어 보였다.
준석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그 뒤로 돈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지난 자재과.
태규 바카라상 한쪽에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태규가 상자를 열었다.
잘못 산 부품을 한번 들여다봤다.
다시 닫았다.
수첩을 펼쳤다.
그 품목 옆에는 자신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재고 있음
태규가 그 밑에 펜을 댔다.
잠깐 생각했다.
기계 확인
검은 볼펜의 뚜껑을 닫았다.
수첩 옆으로 상자를 밀었다.
서랍에는 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