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였던가 복수심이었던가

과거에 바카라임을 묻더라도

by작은 사슴


어릴 적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할 때, 나는 치트를 사용하여 컴퓨터를 상대로 거의 가지고 놀듯이 유린하는 플레이를 즐겨했다.(Show me the money!) 영어라는 것이 English라는 것조차 모르던 백지의 뇌에 선명히 재생되던 에스, 에이치, 오, 더블유, 엠, 이.... 이미 도달 불가능한 절대신의 영역에서 프로그래밍된 컴퓨터 개체를 다양한 곤란에 처하도록 만들고, 마지막엔 압도적인 무력으로 느낄 수 있다면 가장 큰 절망을 느끼도록 건물에 불을 질렀다.


어릴 적엔 포화를 피하느라 분주하던 그 저글링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건지 혹은 그 생각이 무의식에 흡수된 것인지 몰라도, 삶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 이유를 언제나 스스로에게서 찾고 속을 좀먹는 다양한 명제들을 자신만의 것이라고 말하던 시절이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더욱이 와닿았던 이유가 스타크래프트가 알려준 거대한 불가해성, 개인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다는 거대한 힘이 슬롯 전반에 자리하고 있다는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내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힘내 루드비크, 당신의 인생은 참 유감이야.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지만 이해받으려면 몇십 곱절의 언어가 필요할 터인데, 세상은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복수심으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정의로운 행동이 될 수 있는가?"

"개인의 고통에서 비롯된 복수와 공동체적 의미의 정의는 어떤 기준으로 구분되어야 하는가?"


<인생의 열두 가지 법칙>에 던진 질문도 그랬다. 첫 질문은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정해질 수 없는 답이었으므로 중요한 것은 답보다도 질문자의 질문 의도에 있을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 <농담>을 관통하는 덧없음에 매료된 내가 '증오의 복수'와 '정의'를 구분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빗겨나간 복수와 정의의 구분은 의도로 돌아와 문을 두드린다. 솔직히 삶에 닥쳐온 거대한 파도의 잘잘못을 아직도 누군가에게 바카라임 지우고 싶어 하는 무의식의 욕망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금 거대한 질문을 던져 준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있다. 오이디푸스는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라이오스는 이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가 태어나자마자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서 산속에 버렸다. 이 아이는 이웃나라인 코린토스의 한 목동에게 건네졌고, 목동은 다시 이 아이를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와 왕비 메로페에게 바친다. 폴리보스 왕은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는데, 발이 부어 있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Oedipus: 부은 발)'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오이디푸스는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된다.'는 신탁을 받고, 그 운명을 피하려 방랑자가 된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향하던 중 마차를 탄 노인을 만나게 되고, 사소한 시비가 붙어 결국 노인을 죽이게 되는데, 이 죽은 노인이 바로 친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이었다.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신탁의 반은 실현된 것이었다. 한편 이오카스테 왕비는 테베의 오랜 골칫거리이던 스핑크스를 없애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와 결혼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어 스핑크스를 죽게 한 오이디푸스는 약속대로 테베의 왕이 되었다. 또한 미망인이자 그의 친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델포이의 신탁은 완전히 실현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곧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이 곧 자신이며,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고 혼란에 빠진 오이디푸스가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목을 매달아 자살한 후였다. 오이디푸스는 당장에 목숨을 끊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참회의 길을 떠났다.


바카라임이란 관념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인간에게 붙어 따라다니고, 눈먼 자라고 해서 예언은 아니라 말하는 듯하다. 오이디푸스의 바카라임, 두 눈을 멀어버리도록 스스로 처벌한 행위는 정당한 바카라임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헌법을 들여다보면 모든 처벌은 개선과 재슬롯화를 목적으로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것도 고통이 반드시 회개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 감형받는 이유도 이미 어느 정도의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 법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는 그야말로 무죄에 가깝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일체 범죄적인 의도를 첨가하지 않았다. 살인은 정당방위였고, 근친은 나라를 구한다는 약속을 지키고 얻어낸 '보상'이었다. 건실한 청년이었던 그는 어째서 스스로의 눈을 멀게 했는가? 그의 수치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바카라임의 범위를 정의하는 일은 언제나 이해받기 어렵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의 가치는 슬롯적 합의에서 벗어나는 순간 주관적 상대성 안으로 쏟아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진리는 허약한 휴지조각이고, 메시지의 가치와 상관없이 격하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현대에서의 '가치'란 무언가를 생산해야만 한다는 자본주의 명령 아래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이지 않는가? 슬롯라는 연결구조에서 해방된 바카라임의 범위를 묻는 것은 곧 인간 수만큼의 바카라임 수를 파악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힌트삼을 만한 명제가 있다. 인간이란 너무나도 정의하기 어려워 그 특성이란 걸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모두가 공유하는 개념을 이어 설명한다면 "인간의 특성은 유한하게 태어나 자신의 무한성으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요소에 인간의 본질을 확대해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개인의 고통을 먼저 질문해야 할 터, 바카라임의 전형도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성과 중 하나는 자기애로 이어지는 이기심과 타인을 사랑하는 이타심을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고 통합했다는 데 있다. 놀랍게도 사랑은 증오와 닮아 있어서 서로가 서로 안에 담길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증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공격받으면 지키기 위해 발생하는 '반응적 증오'와 자신의 적개심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활성화시키는 '성격적 증오'다. 적어도 반응적 증오에서 대상을 미워하는 까닭은 소중한 것, 사랑하는 것이 파괴되는 상황 때문이다. 특정 감정을 해소하는 법이 그 감정을 유발한 대상에게 적확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듯 반응적 증오는 대상에게 표현한 후 소멸한다. 그에 반해 성격적 증오는 적개심으로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분수처럼 증오를 뿜는다. 원인이 자신 안에 있으므로 해소되지 않고 반복된다. 이런 적개심은 어릴 전 겪었던 사건이나 부모와의 애착관계, 개인 경험 등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익명의 권위'를 통해 두드러지게 입력된다. 익명의 권위는 아이에게 미워할 대상을 만들어주지 않는다.("엄마는 네가 그걸 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아이는 적개심을 품지만 이를 해소할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자신 내면에 이를 저장한다.


이미 인성구조가 된 증오는 성격 안에서 부차적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바깥으로 향하는 증오가 자신을 향하는 증오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야말로 '언제나 증오하려는 마음' 아닌가. 만성적 증오가 가득한 시대에서 '복수'란 대부분의 상황에서 '정당함'을 획득한다. 완결한 도덕성을 보유하지 못한 여느 공인이나 유튜버 등의 '나락 현상'도 대복수의 시대에 걸맞은 '정의'인 것이다.


다시 오이디푸스로 돌아가보자. 그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신탁의 실행에 따른 죄, 무지의 죄, 모르고 저지른 죄에도 바카라임을 다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의 앎은 억압된 것이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스핑크스가 낸 문제(아침엔 다리가 4개, 점심엔 다리가 2개, 저녁엔 다리가 3개인 것은 무엇인가)의 답은 인간이라지만, 더 정확히는 오이디푸스 자신이지 않았는가.

그는 자신에 대해 하나의 답만 알고, 무의식 속에 있는 '자신'을 의식화하지 않았음에 둘의 답을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건 자신의 모름에 대한 속죄, 올바르게 보지 못함에 대한 속죄였다. 이제껏 세상을 봐왔던 자신의 시야를 완전히 리셋하고 파괴하겠다는 의지로 눈을 멀게 함으로써 그는 죽음으로부터 유배된다. 누군가는 그의 망명을 처벌의 연장으로 보겠지만, 내게는 청산으로 보인다. 그는 새 삶을 얻었다.


정의와 복수의 구분으로 보자면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정의인 줄 알았던 복수의 이야기'다. 진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불완전한 애착관계가 형성한 내면의 적개심이, 정당하다는 최면을 거는 정의 뒤에 숨어 오이디푸스 전체의 삶을 조종했으니 그의 상실은 '제대로 보지 못한 죄'로 이어져 결국 청산됐다.

우리는 많은 경우 오이디푸스의 삶을 되풀이한다. 어떻게든 견고히 논리의 탑을 세우고 내면의 수치심을 여과해도, 무의식이 통합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는 시력을 되찾고 다시 그것을 잃기 위한 여정을 되풀이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무분별한 증오로 세상을 덮지 않기 위해 자신을 먼저 통합해야 한다. 초자아의 목소리 뒤에 가려진 불안정한 증오와 혐오가 삶의 기우를 멋대로 조정하고 있고, 정말 약간의 15°씩 배는 방향을 꺾고 있다.

삶이 망가졌다고 느끼는 이의 인생은 결코 순간이 아닌 연속된 선택이었고,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이 악마처럼 속삭였을 것이다. 조던 피터슨의 말이 맞다.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피해자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가 스스로 개성화를 이뤄낼 주체라는 인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이며, 동시에 그 기회마저도 빼앗는 일이다.


인간은 새로운 편안함보다 반복되는 불편함을 더 편안하게 여긴다. 우리 내면의 나약함은 언제나 타인의 잘못이라고 소리치며 편한 선택을 내리려 하고, 그것은 달콤한 말을 해주는 사람들과 시너지를 내며 아늑하게 상해 간다. 타인도 분명한 잘못이 있을 테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는 자신 내면의 두려움과 마주함으로써만 다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주체성을 존중해 주기 위해서라도 우린 바카라임에 대해 논해야 하며, 그가 자신을 팔을 꼬집는 정도의 바카라임의식만 있어도 주체성은 되살아난다. 조던 피터슨은 바카라임의 경계를 논할 때 대상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이해와 인지적 공감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을 조금 보태자면 그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바카라임이다. 타인이 저지른 잘못이 그에게 비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티켓이 아닌데도 많은 이들이 혼동한다. 조언은 사람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있을 때 유효한 것이며, 말하자면 그가 개선을 바랄 때야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조던 피터슨의 말처럼 스스로 나아지기를 원하지 않는 이에게는 아무리 특효약 처방도 듣질 않는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바카라임을 묻는 것은 자신이 오이디푸스의 망령에 사로잡히길 선택했다는 뜻이다. 저장해 둔 적개심을 갑 티슈처럼 마구 뽑아 대상에게 흩뿌리고 나면 잠시 드는 그 만족감에 취해 자신이 얼마나 무바카라임한 짓을 저지르는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합당한 바카라임이란 상대가 오이디푸스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내가 오이디푸스가 되지 않을 것인가의 영역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 서로가 서로를 목적으로 보고, 서로가 자신에게 솔직해질 것. 그 설명이 모호한 만큼이나 실행도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작년에 아주 힘겹게 관계를 끊어낸 지인이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 그의 성장을 응원하고 지켜봐 주었지만, 그는 결코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와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의 모자람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바라보고 관심을 주는 것이 곧 사랑이라 배웠고, 배운 대로 실천하기 위해 가능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응원해 주었지만, 결국 난 성인군자가 아닌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그때 글을 쓰며 인용했던 말이 <인생의 열두 가지 법칙>에서 나오는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였다. 그의 가능성을 믿고 있던 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의 성장을 위해 쓴 말을 할 수 있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 뒤에 숨어있던 건 내면의 나약함이었고,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이 길이 더 쉽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이다.


돌이켜보자면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는 사랑'과 '서로가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랑'은 대결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공존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 아닐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확장하고 성장하려는 욕구가 있고, 그것이 좌절되는 이유는 불안과 공포가 자아를 가득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는 사랑을 겪은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상실할 공포로부터 도망갈 공간이 생기고, 말하자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으므로 오히려 도망가지 않는다. 떨어져도 올라올 사다리가 있으므로 자아의 확장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의 판단 기준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다. 자격증 공부를 하는 것도, 좋은 온라인 게임에 들어가는 것도, 돈을 많이 버는 것도 결국 타자에게 잘 보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 노력을 쏟는 게 우리 인생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는 방식이 대상을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킨다는 개념과 그리 동떨어져있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두 방식 모두 해당하는 관계자 서로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사항임을 알고 있다.


물론 정말로 어린 시절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괴로운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깊은 우울과 과거의 악몽에 시달려 고통받는 것은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 강한 믿음도 포함된다. 피터슨이 말한 것처럼 고통으로 부당함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은 변할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의 조건>에서 제임스 홀리스는 나 자신의 개성화 작업에 임하는 것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우선 나부터 괜찮은 사람이 되자. 그것이 많은 현자가 말하는 공통된 삶의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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