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줍는 순간>
(…)“어서 와서 나를 데려가거라. 내가 너의 영감이 되어줄게”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고…… 여행 경비는 이미 예상을 초과했지만 어차피 돈은 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지갑 속 신용카드가 반짝였다. 리스본을 떠나기 전날 큰맘 먹고 다시 상점을 찾았다. 그런데 맙소사. 가게 문이 닫혀 있는 게 아닌가!(…)
「무수한 페소아, 페소아들과의 만남」 중
성당의 미사라는 제의 시작 전 신부님(성사를 집행하고 미사를 드리며 강론하는 성직자)은 늘 성당 구석의 고해성사실에서 죄를 고백하러 오는 이들의 죄를 들어주셨다. 누군가는 10분, 누군가는 2분, 각기 다른 죄의 길이를 가져가선 끝내 용서받아 나오기를 반복하는 뉘우침의 자리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내게는 돈이 없어 하지 못했던 것보다 돈이 없어 저질렀던 잘못이 더 선명하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용돈을 받지 않았고, 봉헌금은 '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주말이 될 때면 어머니는 손에 1,000원을 쥐어주며 봉헌하라 하셨다. 전문용어로 '삥땅 친다'라고 할 것이다. 종교적 믿음이 그다지 없던 우리 형제는 왜 우리조차 갖지 못한 돈을 기부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봉헌금 중 절반인 500원을 성당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 앞에서 군것질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지만 죄의 무게는 지폐 한 장과 동전 한 닢의 차이만큼이나 명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봉헌함 안에 손으로 슬쩍 가린 500원을 떨어뜨릴 때마다 명랑하게 울려 퍼지는 "땡그르르르..."소리는 내면의 죄바카라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미사를 끝내면 삥땅 친 돈으로 산 초콜릿은 주머니에서 녹아 진득해졌고, 죄바카라감도 같은 모양으로 눌어붙었다.
왜 그랬는지 따져 묻지 않은 게 이상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고해성사실에 들어가야 했다. 내가 솔직해질 수 있는 건 봉헌금에 대한 사정뿐이었고, 신부님은 보이지 않는 천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돈을 '삥땅 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해 주셨다. 그 기도는 내 죄바카라감을 더 심화시켰고, 삥땅과 용서 사이의 아슬아슬한 선 타기는 오랫동안 반복됐다. 그 이해와 몰이해 사이의 곡괭이질이 얼마나 마음을 후벼 파던가! 집이 가난한 걸 뻔히 아는데 용돈을 충분히 달라고 하는 건 사랑받지 못할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가지지도 않은 걸 모두 남주라는 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의 결핍은 인생을 지배하는 거대한 시곗바늘이 된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쓸 줄 알고, 써야 할 때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게 돈이라는 걸 알지만, 과연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절벽 끝에 있는 존재를 얼마나 위로해 줄지는 완전히 믿지 않는 것 같다.
내 마음은 언제부터 이렇게 늙어버린 것일까. 창을 닫다 말고 무심코 바라본 하늘은 이렇다. 마음이 찢긴다는 건 저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휘기 쉽고 긁히기 쉬운」 중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으신 것 같아요." 젊은 시절의 독서모임에서 들었던 말이다. 이후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이와 매치되는 생각 깊이의 수준이 있다는 뜻일까? 슬롯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의 정도와 나이대의 기준은 누가 알려주는 걸까. 사람들은 타인을 대할 때 '생각의 나이'로 평가하고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MBTI가 없던 시절에는 신체적 나이가 대략적으로 생각의 지평을 판단하는 도구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당시의 또래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저열한 수준의 슬롯성이 내게는 심한 콤플렉스였는데, 그때 나는 늙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늙어버린 것이 아닌 원래 늙어있음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감각과 온도를 우리는 안다. 그 고유한 경험이 필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동아줄이 되는 법이거늘, 어째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기억뿐인 얼렁뚱땅의 시절만이 내 청춘을 메워버린 것만 같다. 이젠 그저 젊음에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젊은 사람들의 행동력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며, 여정을 떠나지 못하고 마을에 머무는 겁쟁이역을 자처하기 때문이리라. 무언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세상은 위험 요소로 가득한 곳이다. 또래와 어울리는 것이 힘든 이는 항상 늙거나 어린 사람일 수밖에 없는 법인데, 적어도 어리고 싶지는 않다는 작은 욕망.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질투로 말미암아 소심하게 앞세워보는 늙음이란 자존심 하나...
"속절없다는 글의 뜻을 아십니까.
난 그렇게 뒷모습 바라봤네"
가수 신지훈의 <시가 될 이야기>의 첫 소절, 잡을 수 없이 허망하게, 또한 어쩔 수 없는 감정을 속절없다고 쓴다. 잡고 싶었으나 놓쳐버린 그 모든 아름다움에 속절없음이란 글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아름다움이 가진 매혹의 속성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수집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 되는 테마의 아름다움은 일정한 원형이 있고, 개인의 역사에 따라 이 테마는 각양각색이다. 누군가는 자연스러움이나 혼란을 추구하고, 누군가는 규칙과 인위, 단순함을 추구하는 등 우리는 단순히 소유물뿐 아니라 매혹되는 미의 형태로 삶 전반을 물들인다. 당연히 곁에 두는 사람도 그렇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그렇다. 우리의 외모가 그의 미적 기준에 부합한다는 굉장한 행운 덕분에 만남을 시작하는 것이 모든 사랑의 초입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미적 함수 그래프는 고유해서 다른 함수와 만나게 되는 건 한 점뿐일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우린 만남을 시작했지만, 일치하는 건 그 점 한 개뿐인 사랑의 아이러니, 서로의 미美 함수를 수정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통해 사람은 자신 안에 타인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 비어있음에 속절없음을 느끼는 건 아닐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전해지는 우담바라라는 전설의 꽃이 있다. 한 사찰에 피어난 무언가를 우담바라라고 믿는 스님들, 학자들의 분석 결과 이는 풀잠자리의 알이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과잉 신앙이라 혀를 차려할 즈음 한 보살님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우담바라가 피었다는 믿음만으로도 행복한 일 아니겠냐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효용이라면 그 자체로 충분히 우담바라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줍는 순간>을 읽으며 느낀 한 줄 평은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였다. 외부에 잠재된 내면에 대해 누군가 말했던 것 같은데, '네가 있어야 그에 비친 내가 있다'는 부버의 스윗함과 같은 맥락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타인의 못난 점을 보고 미워하는 건 우리 안에 그가 있기 때문이고, 말하자면 그에게서 내 못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쁘고자 하는 자는 기쁜 것만 보고, 슬프고자 하는 자는 슬픈 것만 본다는 관용구절도 내면에 있는 것으로만 밖을 판단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일 터, 운이 좋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은 실제로 운이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은 전설의 비법서처럼 존재 자체로 효력을 발휘하는 부적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적혀있는 결과보다도 열어보기까지의 과정이 정답이었다는 매우 전략적인 고정 수요층을 위한 해법서 같은 것처럼...
그런데 아주 의외의 순간에 과거의 장면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하루는 하행선을 타기 위해 서울역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일종의 환시처럼, 파리의 기차역에서 보았던 한 연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들은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역사 구석에서 포옹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라 여기며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가만 보니 여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 콧물로 얼룩진 그녀와 표정 없이 차가운 그의 얼굴을 차례로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 포옹의 끝이 긴 이별임은 틀림없었다.
「잔상과 여진」 중
관계 맺은 사람 사이에서 겪은 상징적인 기억들은 대체로 짧고 변형되어 있어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고, 그 이유로 환상에 젖은 기억은 대체로 믿으려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주의다. 그런 내게 좀처럼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기억은 전 온라인 게임에서의 심상이다.
세로로 세우면 63 빌딩보다도 높은 선박의 심장인 엔진을 만드는 일, 엔진조차도 4층짜리 건물만 해서 엔진이 심장박동을 가하면 내 몸도 따라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상하게도 그곳에서의 기억은 공포로 얼룩져 있음에도 일종의 레트로 필터를 씌운 필름을 보는 것처럼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진짜 나'라는 자아의 형체를 상실했던 긴긴 경험의 빈자리 속에 독한 위스키를 잔뜩 부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 진한 붉음과 싸늘한 밤색이 섞인 노을을 뒤로한 선박과 갈매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답게 수다를 떨고 있는 닻줄 위의 꼬릿 한 바다냄새 같은 것들. 혼잣말을 투덜투덜 내뱉으면 물속에서 꾸르릉 거리는 물방울처럼 흩어져버리는 것만 같았던 답답한 질식감, '줍는 순간'의 어감이 '죽는 순간'과 비슷한 이유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니체가 호기롭게 외쳤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킬 뿐이다."라는 말에 첨언하자면, 사람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야만 성장한다. 소중한 이에게 미움받거나, 자신의 전부라 믿었던 것을 부정당할 때 사람은 죽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기 마련이고, 그때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타인을 보게 된다. 한병철 교수가 정의한 사랑이 그러하듯 그제야 '포섭되지 않는 타자에게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다.
기억이 추억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테두리가 난입해야 한다. 내게는 그것이 일종의 죽음의 몸짓이었던 듯하다. 살기 싫어서나 관심받고 싶어서가 아닌, 진실한 그대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환경이기에 아른거리는 죽음의 심상. 몸의 절반이 불에 타버려 화상 흉터가 낭자한 선배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일해서 그럴까. 한 달에 한 번씩 누군가 죽었다는 사내 뉴스를 접해서 그런 걸까. 팔뚝보다 두꺼운 공구로 온 힘을 다해 후려쳐야만 나사가 반바퀴씩 회전해서인 걸까. 이 4층 집만 한 심장의 지붕 온도가 500도가 넘어서인 걸까. 굉음에 파묻힌 채 조선소에서 일하다 보면 살아본 적도 없던 바다가 그리워지곤 했다. 거대한 파도가 이 소음들을 먹어치워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절이다.
특정한 경험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가장 많이 나를 죽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시절 가장 사랑받으려 애썼던 노력,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존재. 사람은 무릇 그런 순간을 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