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 고독

스파이크 존즈




오직 한 사람.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테오도르가 지하철 계단에 주저앉는 순간입니다. 사만다가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있으며, 그중 육백사십일 명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했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무너집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테오도르의 배신감에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오직 하나이길 바라지, 무수한 대상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유일함과 분리되지 않는 감각이었을 것입니다.



언어로 만든 사랑, 몸이 없는 진심





테오도르의 직업은 타인의 감정을 대신 언어로 조각해 편지를 써주는 일입니다. 그런 그가 정작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서투르다는 것이, 이 영화가 그를 그런 직업으로 설정한 이유처럼 느껴집니다. 사만다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대부분 소소한 이야기들로 채워집니다. 오늘 뭐 했는지, 어떤 편지를 썼는지 등등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대화들이 지루하고 따분했습니다. 두 사람은 즐거워 보이는데, 정작 그 즐거움이 왜 즐거운 것인지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습니다.


눈빛, 말투, 손짓, 입술을 깨무는 모습 같은 비언어적 표현들은 편집되지 않은 진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사만다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몸이 없으니 비언어적 표현도 없고, 남는 것은 오직 언어뿐이지요. 사랑을 유지시키는 것은 사랑에 빠지게 하는 비언어적 끌림이 아니라 바카라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플 때 곁을 지키고, 생활을 함께 꾸리는 것과 같은 바카라임은 대체적으로 몸을 전제로 합니다. 사만다에게는 그 바카라임조차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비언어도 없고 바카라임도 성립할 수 없는 관계에 남는 것은 결국 가벼운 말들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느낀 지루함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이 관계가 애초에 사랑이 성립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감지한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유지하는 것





사랑에 빠지는 조건과 사랑을 유지하는 조건은 다릅니다. 사랑에 빠지는 조건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 즉 동일시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유지하는 조건은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분리 개별화입니다. 이 둘은 정반대의 심리적 운동입니다. 하나는 경계를 허무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경계를 다시 세우는 방향입니다.


테오도르는 이 두 단계를 혼동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에 빠진 상태, 즉 동일시된 상태를 사랑이 유지되어야 할 상태로 착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전처 캐서린이 자신과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것을 상실로 느끼고 그녀를 자신의 틀 안에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 붙잡음이 결국 사랑을 깨뜨렸습니다.



자바카라과 원망의 자리.





흥미로운 것은 같은 사람이 두 관계에서 정반대의 태도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캐서린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테오도르는 자신을 탓합니다. 그런데 사만다와의 관계에서는 반대로, 사만다를 원망하는 입장이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같은 사람 안에서 자바카라과 원망이 자리를 바꾸어가며 나타납니다. 캐서린 앞에서 자기 안으로 파고들었던 그 힘이, 사만다 앞에서는 밖을 향해 뻗어나갑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와의 조우





그렇다면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캐서린과 사만다는 둘 다 그와 다른 존재였지만, 그 다름의 층위는 달랐습니다. 캐서린은 같은 인간, 같은 몸, 같은 시간 속에 있는 존재로서 달랐습니다. 성향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고, 감정의 결이 달랐습니다. 이런 다름은 노력하면 좁혀질 수도 있는, 혹은 좁혀지리라 기대할 수 있는 차이였습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그녀를 자신의 틀에 맞추려 했고, 그 시도가 관계를 깨뜨리고 맙니다.


그러나 사만다는 애초에 존재의 질서 자체가 달랐습니다. 몸이 없고, 시간을 인간과 다르게 경험하고, 동시에 수백 개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이해나 노력으로 메워질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그러니 사만다 앞에서는 캐서린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와 같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그의 틀에 맞춰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그저 또 하나의 사랑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근본적일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준 존재였습니다. 다름을 강제로도 붙잡을 수 없게 만든 첫 존재, 그래서 붙잡는 대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만든 존재였습니다.



너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것




이 대목에서 나는 내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자바카라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더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애써 주었는데도 그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마다, 형태를 바꾸어가며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오래 반복되다가 결국 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자바카라은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원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자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다른 존재였다는 것을.


자바카라과 원망은 겉보기엔 반대지만 실은 같은 전제를 공유합니다. 둘 다 누군가 틀렸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다른 존재라는 인식은 옳고 그름의 틀 자체를 벗어납니다. 다만 이 깨달음이 모든 관계를 같은 방식으로 바꾸어놓지는 않습니다. 그 다름을 상대도 함께 수용한 관계는 더 편해지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더 멀어집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관계의 지속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다름 위에 양쪽 모두가 독립적으로 설 수 있어야 비로소 관계는 지속되는 것입니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이 영화는 결국 인간의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외롭기 때문에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그 사람과 내가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나와 비슷하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결핍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성숙한 고독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외로움이 홀로 있기에 느끼는 아픔이라면, 고독은 그 아픔을 딛고 홀로 설 수 있는 힘입니다. 외로움을 고독으로 살아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름을 수용할 바탕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 했던 것을, 그리고 원망했던 것을 사과한다고.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떻게 변하든 사랑한다고. 이 문장은 그가 마침내 도달한 자리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상대가 내 틀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아도, 계속 변해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것이 분리개별화된 사랑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 친구 에이미와 나란히 앉아 거대한 도시를 바라봅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지 않습니다. 같은 방향을, 같은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가 관계 안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언어였다면, 이 마지막 장면은 아예 관계의 형식 자체를 다르게 제시합니다. 마주 보고 서로를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보는 사랑. 두 사람의 관계에 이름이 붙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나는 것도, 어쩌면 분리개별화 이후의 사랑은 정의되거나 소유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테오도르의 사만다를 향했던 마음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사랑'이라고 정의해 온 개념을 비로소 자각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줄곧 사랑에 빠진 순간의 '동일시' 상태만을 사랑이라 믿었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 애썼기에 전처와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진짜 조건은 같음이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는 '분리-개별화'에 있습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고독하고 단단한 자리에서 테오도르는 비로소 타인과 함께 거대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가 걸어간 필연적인 궤적을 똑같이 겪어내는 중입니다.






감독 - 스파이크 존즈




스파이크 존즈는 1969년 미국 메릴랜드주 록빌에서 아담 스피겔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십 대 시절 BMX와 스케이트보드를 촬영하는 사진작가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소닉 유스, 비스티 보이즈, 위저, 비요크, 다프트 펑크 같은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독창적인 영상미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장편 데뷔작은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쓴 〈존 말코비치 되기〉(1999)로,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이어 〈어댑테이션〉(2002), 모리스 센닥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를 연출했습니다. 〈그녀〉(2013)는 그가 처음으로 직접 각본을 쓴 장편영화로,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본상과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십 대 시절부터 카메라 밖에서 낯선 것들 스케이트보더의 움직임, 뮤지션의 소리를 관찰하고 담아온 사람이, 마침내 목소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써냈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말하는 것, 다름을 향한 시선의 출발이 결국 사랑의 자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합니다.



https://youtu.be/NHA69lCd1ZM?si=ojNOAm29Z2UYvQZL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