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토르나토레
(이 리뷰는 결말을 포함합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인틴헌드레드가 배에서 내리기를 응원했습니다. 그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 많은 것을 경험해 보기를, 그래서 그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끝까지 그 소망을 배반합니다. 그는 내리지 않습니다. 아니, 내리지 않기를 선택하지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두 개의 장면 사이를 오래 오갔습니다.
그가 배에서 내리려고 결심했을 때, 그는 선원들과 담담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배와 육지를 잇는 계단을 내려갑니다. 그런데 계단의 중간쯤에서 멈춰 섭니다. 눈앞에 펼쳐진 도시-끝을 가늠할 수 없는 건물들, 무수한 길들, 무한히 뻗어나가는 세계-를 바라보던 그는 쓰고 있던 모자를 물속으로 던져버리고, 몸을 돌려 다시 배로 돌아갑니다.
나는 이 장면을 오래 곱씹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그는 스스로 답합니다.
' 피아노 건반은 88개,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어.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거야. '
그는 유한한 건반 위에서 무한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무한한 건반 위에서는 오히려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없다는 것이었죠. 수천 개의 길 앞에서 어떻게 단 하나의 길을 고를 수 있느냐고, 그는 되묻습니다. 그에게 육지는 너무 큰 배였고,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너무 긴 여행이었고, 너무 강한 향수였으며, 끝내 자신이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었습니다.
가능성의 무한함과 선택의 무한함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지요. 선택이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택하고 다른 무언가를 버리는 유한화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눈앞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조차 가늠할 근거가 사라지고 맙니다. 무한 앞에서는 오히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건반이 무한하다면,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없다는 그의 말은, 세상이 무한해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그 안에서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지극히 협소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8개라는 제약이야말로 그가 매 순간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습니다. 유한함이 그를 가둔 것이 아니라, 유한함이 그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의 유일한 친구 맥스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배를 떠나 육지에서 살아가며,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 (결혼, 돈, 자유로운 선택)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 초라한 행색으로 자신의 트럼펫을 전당포에 맡기려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속이 상했습니다. 그는 무한한 세상을 선택했지만 유한한 선택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내려놓아야 했으니까요.
나인틴헌드레드는 무한한 상실을 통해 무언가를 획득했고, 맥스는 무한한 가능성의 획득을 통해 무언가를 상실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선택의 방향과 그 결과는 완전히 뒤집혀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혹은 어떤 잣대로 보면 나인틴헌드레드는 알을 깨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도전하지 않았고, 성장을 거부했으며, 결국 배와 함께 스스로를 폭파시켰다고. 그러나 그의 자리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무한함을 끝까지 지켰고,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짜였던 세계를 끝까지 지켜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인틴헌드레드는 연주라는 행위 자체를 선택했고, 맥스는 아직 선택하지 않은 무언가(결혼, 돈, 성공)를 향해 걸어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쁜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나는 서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압니다. 내가 맥스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나인틴헌드레드에게 느꼈던 그 마음은 어쩌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살아보지 못한 자의, 슬롯가 비추어놓은 소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자기를 벗어나라는 요구를 받으며 자랐고, 그래서 대부분 자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맥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더 가깝고, 나인틴헌드레드를 향해 가지는 그 감정이야말로 슬롯가 내 마음에 비추어놓은 결핍이었을지 모릅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맥스가 주인공과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내 삶에서 스쳐간 몇몇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나 역시 내가 탄 배에서 나인틴헌드레드 같은 이들을 두고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맥스가 나인틴헌드레드를 아꼈던 것처럼 나는 그들을 사랑했고 무척 아꼈습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그 상실감에 아파야만 했습니다. 그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온 나 자신이 쓸모없고 무가치하게 느껴졌습니다. 폭파되는 배를 보면서 더러워진 소매로 눈물을 많이도 닦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그립습니다.
내가 내리기를 선택한 것처럼 그들 역시 자신의 조건 안에서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그들을 잃었다는 그 사실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상실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몫인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 괴로움의 더 깊은 자리에는,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을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자각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배에서 내렸고 그들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잃은 슬픔 속에는, 내가 나 자신을 잃어온 시간에 대한 슬픔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한함을 향해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무한함을 스스로 창조할 것인가. 맥스는 전자를 택했고, 무한함이 저 바깥 어딘가에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나인틴헌드레드는 후자를 택했고, 유한한 조건 안에서 매 순간 다른 무한을 빚어냈습니다. 배 안에 갇혀 있던 그가 오히려 가장 넓은 곳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여전히 어느 쪽이 좋은 선택이었는지, 어느 쪽이 덜 좋은 선택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맥스의 삶도, 주인공의 삶도 그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에 나는 오늘 저녁 메뉴를 걱정하고 있는 너무나 본능적인 인간입니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선택>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한 존재가 세상 앞에서 끝까지 지킬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주체성이 아닐까요.
이 영화를 만든 주세페 토르나토레는 1956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바게리아에서 태어난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나폴리의 범죄 조직을 다룬 첫 장편 『일 카모리스타』(1985)로 데뷔해 신인감독상을 받았고,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장편 〈시네마 천국〉(1988)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안으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1998년 작품으로, 이탈리아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가 쓴 90분짜리 1인극 대본 『노베첸토』를 스크린으로 옮긴 것입니다. 원작은 배우 한 사람이 무대 위에서 나인틴헌드레드의 일생 전체를 홀로 이야기하는 독백극이었는데, 토르나토레는 이를 대서양을 오가는 여객선 버지니안 호의 방대한 풍경과 재즈의 시대로 확장해 담아냈습니다.
주연은 팀 로스가 맡았고, 이 영화의 애잔한 선율은 〈시네마 천국〉에 이어 다시 한번 엔니오 모리코네가 지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듬해인 1999년 이탈리아의 나스트리 다르젠토(실버 리본)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미술상을 받았습니다.
바다 위에서 태어나 바다 위에서 생을 마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유한한 고향(시칠리아의 작은 극장, 혹은 배 한 척)을 무대로 반복해서 그려온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말하는 것—유한함 안에서 무한을 창조하는 삶—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합니다.
https://youtu.be/ztXw4kB4JLg?si=Z9nmWxlC5kYOcKz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