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라이트먼
1987년 미국의 작은 마을,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는 아델과 열세 살 아들 헨리는 마트에서 부상당한 탈옥수 프랭크를 만나 집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노동절 연휴 닷새 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예상치 못한 관계가 자라납니다.
탈옥수를 숨겨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델을 욕할 수 없었습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부르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 불편함을 따라가 보니, 이 영화는 로맨스가 아니라 애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델은 큰 상실을 겪은 여자입니다. 몇 번의 유산, 출산 중에 잃은 아이, 그리고 떠나버린 남편. 상실이 애도되지 못한 채 깊어지고 길어지면 결핍이 됩니다. 결핍을 안은 사람은 또 다른 상실을 만나도 애도하기보다 자기 결핍을 채우려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아델은 누군가로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아델이 세상에서 자신을 전부 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은행 직원은 그녀를 알아보고, 이웃 여자는 장애가 있는 자신의 아이를 그녀에게 맡깁니다. 복숭아를 들고 온 이웃은 탈옥범을 조심하라며 걱정해 주죠. 신뢰는 끊어진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델이 우울에 갇힌 것이 아니라 애도의 방에 머물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델의 아들 헨리도 애도 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새 가정을 꾸리며 헨리는 아버지를 잃었고, 아이와 남편을 잃은 엄마의 애도 곁에서 자기 슬픔은 미뤄둔 채 엄마의 상실에 함께 머물고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하루 남편 쿠폰'을 건넬 만큼, 떠난 아버지의 자리를 제 손으로 메우려 합니다.
모자의 이 시간들은 어른이 된 헨리의 목소리로 회상이 됩니다. 애도에 머무는 사람은 과거의 상실로 돌아가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영화의 첫 부분이 회상으로 흐르는 것은,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죠.
프랭크도 같은 자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그는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형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과거의 슬픔 곁에 머물렀습니다. 프랭크가 법이 가둔 감옥에 있었다면, 아델은 슬픔의 감옥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 프랭크를 깨운 것은 감각, 즉 통증이었습니다. 맹장 수술로 몸이 열린 순간, 피할 수 없는 아픔이 그를 과거에서 현재로 불러냈습니다. 그는 병원 창문을 넘어 세상으로 나왔고, 옆구리에 피가 밴 채 마트에서 헨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쫓기는 사람이었지만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도망자였으나 마음은 도망치고 있지 않았단 증거이기도 하죠. 저는 그가 아주 먼 길을 혼자 걸어온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먼 길을 혼자 걸어온 사람에게는 특유의 눈빛이 있습니다. 깊고 단단하며,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봅니다. 많이 잃어본 사람은 지금 곁에 있는 것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음을 알기에, 눈앞의 것을 붙잡듯 보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아델과 헨리를 바라보던 프랭크의 눈이 그랬습니다. 그 단단함은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라, 상처를 끝까지 마주했기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타나자 영화의 시간이 바뀝니다. 회상으로 흐르던 과거가 현재가 됩니다. 프랭크가 아델을 의자에 묶는 장면, 그녀의 몸에 닿는 장면은 길고 느립니다.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그렇습니다. 만지고, 고치고, 움직입니다. 감각은 과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만 일어나지요. 과거 애도의 방에 머물던 아델을 현재로 불러온 사람은 <감각하는> 프랭크였습니다.
프랭크가 엄마 곁을 채우자 헨리는 비로소 엄마의 남편 역할에서 내려와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공을 던지고, 차를 고치는 걸 곁에서 보고, 함께 파이를 만들며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것을 감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헨리는 프랭크를 감각으로 기억합니다. 파티시에가 된 그의 손에는 그 여름의 반죽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상실은 사건이고, 상실감은 감정입니다. 애도가 필요한 상실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애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지금 상실 <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애도는 <현재,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애도되지 못한 과거의 상실은 사람을 현재가 아닌 과거에 머물게 합니다. 슬픔 곁에 머무는 것이 애도의 시작이라면, 애도의 완성은 현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현재에 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감각>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프랭크의 팔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도망자라면 다리가 그를 설명해야 하지만, 프랭크는 팔로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다리는 떠나는 몸이고, 팔은 머무는 몸입니다. 붙잡고, 들어 올리고, 고치고, 반죽하고, 감쌉니다. 쫓기는 와중에도 그는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감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팔이 왜 그렇게 눈에 밟혔는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습니다. 제게 부성은 보호의 상징입니다. 이 위험한 세상에서 저를 지켜주고, 안전한 길로 이끌어주며,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건네주는 사람이죠. 그 보호가 없었기에 세상은 늘 두려운 곳이었고, 세상을 읽는 법도 혼자 먼 길을 걸으며 스스로 찾아야만 했습니다. 결핍은 환상통처럼 아픕니다. 팔다리를 잃으면 없는 팔이 있는 것처럼 아프듯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보호의 팔이 없는 채로 늘 통증을 일으킵니다. 프랭크의 팔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 것은, 거기가 바로 제 환상통이 있는 자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환상통을 달래는 방법 중에 거울 치료가 있다고 하지요. 거울에 남은 팔을 비추어 잃어버린 팔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면, 통증이 조금 누그러진다고 합니다. 프랭크의 팔은 제게 그런 거울이었습니다. 결핍을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그 자리에 무엇이 있어야 했는지 비추어주며 잠시 통증을 달래주었습니다. 그 단단한 팔이 전하는 감각이 아델과 헨리에게, 그리고 저에게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상실이 상실을 알아보았고, 상실이 상실을 위로했습니다. 애도의 자리에서 통증으로 깨어난 프랭크가, 애도의 자리에서 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두 사람을 감각으로 깨웠습니다.
닷새는 짧았고 프랭크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델은 그 빈자리를 누구로도 채우지 않고 긴 세월을 기다립니다. 결핍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다면 그렇게 기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장 채워줄 사람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의 빈자리를 메우는 사랑이 아니라, 각자의 애도를 끝까지 통과한 뒤에 도착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욕할 수 없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제게 애도가 필요한 하루에 찾아왔습니다. 애도되지 못한 상실이 결핍이 된다는 문장은, 사실 제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덟 살의 갑작스러운 슬픔은 애도되지 못한 채 결핍으로 남았습니다. 누구도 저를 이끌어주지 않고,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며, 누구도 저를 귀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소외감과 외로움. 그 결핍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처럼 슬펐습니다.
그러나 결핍이 애도되지 못한 상실이라면, 결핍을 알아보는 순간 그것은 다시 애도할 수 있는 상실이 됩니다. 채워야 할 구멍이 아니라, 슬퍼해줄 수 있는 무언가로. 오늘의 슬픔은 여덟 살의 제가 이제야 조금씩 울 수 있게 된 증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도가 완성된 자리에서, 프랭크와 아델의 사랑은 비로소 결실을 맺습니다. 저의 애도가 완성되는 자리에도, 언젠가 무언가 피어나기를 바라봅니다.
이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땡큐 포 스모킹』(2005), 『주노』(2007), 『인 디 에어』(2009), 『영 어덜트』(2011),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2021), 『새터데이 나이트』(2024)가 있으며,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두 번 오르는 등 네 차례 아카데미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골든글로브를 한 차례 수상했습니다.
그의 영화는 날카롭고 재치 있는 풍자와 인간적인 드라마를 함께 녹여내는 경우가 많고, 각본가 디아블로 코디와 자주 작업해 왔습니다. 원치 않은 임신 앞에 선 십 대 소녀『주노』, 해고를 통보하며 떠도는 남자 『인 디 에어』처럼, 삶의 갈림길에서 흔들리는 인물을 가볍지 않게, 그러나 무겁지만도 않게 바라보는 감독입니다.
『레이버데이』는 그가 연출과 각본, 제작을 모두 맡은 2013년 작품으로, 조이스 메이너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특유의 경쾌한 풍자를 내려놓고 느리고 감각적인 멜로드라마로 방향을 튼 작품이라,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결이 다른 영화로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