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불어나던 숫자의 정체
오래된 절친이 있다. 멀리서 각자 사느라 바빠서 얼굴은 자주 못 봐도, 한 번 만나면 밤새 수다를 떨며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이. 근데 서로 바쁘다 보니 어느새 연락이 반년 가까이 끊겨 있었다.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다가, 친구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나... 할 말이 있어."
"뭔데, 왜 그래?"
"최근에 나 사기를 당한 것 같아..."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무슨 일인지 물으니, 친구가 천천히 얘기를 풀어놨다.
몇 달 전, 어떤 회사에 투자를 했다고 한다. 얼마를 넣으면 높은 수익률을 보장해준다고 했고, 실제로 호가창처럼 생긴 화면을 보여줬다고 했다. 매일 접속해보면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 있었다. 그 화면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친구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여보, 조금만 기다려. 내가 여보 차도 바꿔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게."
남편한테 그렇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단다. 수익이 늘어나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고, 투자금도 조금씩 늘려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자동차 한 대 값쯤 되는 돈이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회사가 갑자기 사라졌단다. 담당자라던 사람도 연락이 끊겼고, 회사도 온데간데 없었다. 매일 들여다보던 그 화면은, 알고 보니 존재하지도 않는 사이트였다.
"이게 진짜, 지금 이렇게 말로 들으면 어떻게 그런 걸 믿고 그 큰돈을 넣었을까 싶겠지." 친구가 씁쓸하게 말했다. "근데 현아야, 사람이 뭔가에 홀리면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
나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뉴스에서나 듣던 투자 리딩방 사기, 그런 게 내 가까운 친구한테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조금 더 자주 연락하며 투자 얘기라도 나눴더라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인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가 여럿이라 단체로 경찰에 신고하고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근데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한다고 했다.
전화를 끊기 전, 친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아. 돈 앞에 눈이 멀었었나 봐."
"그러니까! 좀 더 알아봤어야지…"
속상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쓰린 핀잔이 나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마음이 무거웠다. 친구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대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유는 결국 조급함이었다.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마음.
투자라는 걸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알아보려면 까마득하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알아보기 귀찮은 마음도 크다.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니까. 그러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그냥 맡기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 근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 판단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대서 투자를 하면, 잘되면 "나의 선택이 옳았지" 싶다가도, 안되면 꼭 그 누군가를 원망하게 된다. 그렇다고 누가 발 벗고 나서서 바카라임져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아무것도 안 하거나, 하다가도 금방 포기하고 만다.
사실 나와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재테크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 바카라부터 좀 읽자"로 시작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근데 바카라 읽고, 공부하고, 그걸 실제 투자로 이어가기까지가 어디 쉬운가. 먹고 사는 것도 바쁜데 언제 공부까지 하랴. 솔직히 귀찮다. 그 귀찮음과 조급함 사이 어디쯤에서, 누군가 "돈 벌 수 있다"고 손을 내밀면 덜컥 믿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빨리 뭔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사람을 실수하게 만든다.
예전에 어떤 바카라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이 자꾸 타인의 말에 기대려는 이유는, 공부와 고생은 최대한 피하면서 큰돈은 벌고 싶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타인에게 기대어 내리는 결정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고 했다. 결국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고 “공부와 고생” 그 자체에 있다는 말이었다. 뜨끔할 정도로 어디하나 틀린데 없는 말이었다.
‘빨리 부자가 되려면 빨리 부자가 되려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해나가는 게 결국 가장 빠르게 부자가 되는 길이라는 걸, 나는 친구의 일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도 그런 조급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부동산 투자를 하면서도, 주식 투자를 시작하면서도 남들 다 하는 것 같은 투자에 나만 안 하고 있으면 괜히 초조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급하게 덜컥 저지른 일들은 항상 크든 작든 후회라는 것이 따라왔다. 이제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뇐다. 이 시장은 내일도 있고, 내년도 있다. 오늘 당장 올라타지 못한다고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자. 마치 마라톤처럼.
마라톤도 그렇다. 출발선에서 남들이 앞서 나간다고 무리해서 페이스를 올리면, 얼마 못 가 지쳐 주저앉는다. 내 호흡, 내 속도를 지키면서 천천히 가는 사람이 결국 완주한다. 투자도 다르지 않다. 급하게 큰돈을 벌겠다는 마음이 앞서는 순간, 판단은 흐려지고 위험한 곳에 쉽게 발을 들이게 된다.
친구가 겪은 일은, 남 얘기가 아니었다. 조급함이 우리 모두의 마음 어딘가에 있고, 그 틈을 노리는 사람들이 세상엔 늘 있다. 확실한 수익을 약속하는 말, 눈앞에서 불어나는 숫자, 그런 것들이 달콤하게 다가올수록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서 봐야 한다.돈 공부도 결국 천천히 가는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다. 오늘 조금 늦어도 괜찮다. 내일도, 내년도 기회는 다시 온다. “조급함을 내려놓는 것”, 그게 어쩌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투자 공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