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1004, 1994년의 편지와 부치지 않은 답장

02 가을 타는 군인 아저씨

by자크슈타인


DEAR 1004

가을을 탄다는 오빠의 말에 이해가 팍팍가긴 했지만 가을엔 좋던 사람도 싫어진다는 어떤 선배의 말의 생각나서 생각해보니 잘해준 것도 하나도 없고 해서 뜨끔했답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막 좋아지고 그런다던데 가을인데도 이렇게 좋으니 봄이 되면 좋아서 어떻하나 걱정도 되고... 헤..

잘하는 것도 없고 잘해준 것도 없지만 사실은 많이많이 생각하는 데도 많이많이 신경쓰려고 노력하는데도 잘 되기는 커녕 매번 망치기만 하고 괜히 기분만 상하게 하고 나같아도 기분나쁠 것 같은 일인데도 바꿔 생각하지도 못하고 에휴.

웃는 모습을 본지 오래된 것 같아서 재미있는 얘기를 웃기는 얘기라도 안다면 마구마구 재밌게 해드려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도 속상하게도 그런건 절대 못하고 그렇다고 간지럼을 잘 태우는 것도 애교있게 잘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돌리고 돌리다가 결국 생각한게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편지 받는거 좋아하는 것 같아서 혹시 오빠도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안되는 글솜씨로 끄적끄적 대고 있는데 괜히 분위기 깬다고 미워하지 말고 그냥...
그냥 기분 쬐금이라도 좋으라고...

오늘 스파게티 먹으면서 된장 같다는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고 친구가 너무너무 맛있는 칵테일을 마시는 걸 보고 담에 꼭 오빠 한잔 사주리라 생각하고 그 긴 영어 이름을 외우려고 했는데 머리가 감당을 못해서 완전히 외우진 못했지만 메뉴판만 본다면 생각해 내리라 굳게 다짐했고 예쁜 편지지를 보고는 펜들 일이 거의 없으면서도 뭔가 멋지고 분위기 있는 가을틱한 글을 적어 보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고 글씨도 예쁜 색으로 적고 싶어져서 하나 구입해 보고 카페 의자가 너무 푹신하고 포근해서 학회실에 갖다 놓으면 누구도 좋아하겠고 누구도 좋아하겠지만 오빠도 너무 좋아하고 코자는데 애용할 것 같아서 너무 탐났고 이상한 조명시설이 있던 노래방 입구에선 회뿌연 옷 입고 갔다가 엄청 쪽팔렸던 기억나고 노래를 들어도 가수의 목소리보다 오빠가 불렀던게 더 기억나고 날씬한 군인 아저씨를 보고 앞머리 길게 기른 사람을 보고 창동역 종점인 11번 버스를 보고는 되게 많이 생각났고 귀찮아 할 것 같아도 호출 안하고는 궁금해서 잠이 안와서 전화해서는 예쁘고 좋은 말만 하고 싶었는데 괜히 칙칙하고 쓸데없는 말만 나오고

에휴..


‘부치지 못한 답장’


편지 잘 받았다.


첨엔 그냥 웃으면서 읽었는데, 읽다보니 기분이 좀 이상해 지고 가슴에 돌덩이라도 얹은 듯 답답해 지더구나.


왜 자꾸 잘해준 게 없다고 그러니.


스파게티를 먹다가, 맛있는 칵테일 이름을 외면서, 푹신한 의자를 보다가, 노래방에서.. 시시각각 오빠를 떠올려 주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잘해준 게 없는 사람이겠니.

오빠가 네 하루에 그렇게 많이 들어가 있다니 정말 고맙다.

그리고 좋다. 아주 많이.


가을을 탄다고 했던 건 어쩐지 쓸쓸한 마음을 정당화 하기 위한 핑계였어. 가을이 오니 괜히 마음이 더 허전해지고, 이곳에 있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고, 여기 내무반 공간이 더 갑갑해지기만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더 보고 싶어지고 그러니까..


네 편지 덕분에 가을을 조금은 잘 탈 것 같아.

그러니 걱정하지 않음 좋겠다.


이제 이렇게 봄이 두번만 더 지나면 드디어 널 볼수 있겠지.

봄이 오면 더 좋아질까봐 하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구.

그저 지금처럼만, 아니 조금은 더 옅어지더라도 괜찮겠어.


재미있는 얘기를 못한다고 했는데 그건 맞아.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단다. 오빠는 네가 웃기려고 애쓰는 것보다 이렇게 아무 이야기나 잔뜩 늘어놓는 게 더 재미있거든. 그리고 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오빠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잘 몰랐나 보구나.


시간이 멈춰있는 것만 같은 이곳에서, 그곳의 하루를 이렇게 멀리서 받아보는 순간의 기분은 참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너의 이야기에 잠시나마 즐겁고 살아있는 기분이 들다가도, 그곳의 사람들은 활기차고 의미있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데 나만 팽개쳐진 듯한 느낌이 머릿 속에 겹쳐져서 말야.


오늘 어디를 갔는지, 뭘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 그래도 그런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생생히 떠올라.


네 옆에서 스파게티를 처음 먹어보고,

‘키스오브화이어’ 같은 칵테일 이름을 같이 메뉴판에서 찾아서 주문하고 그랬던.


오빠도 비슷해.


오랜만에 고참의 허락을 받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판기 커피 한잔 꺼내들고 전화박스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마음. 오늘은 이런 저런 얘길 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정작 수화기 넘어 반가와 하는 네 목소리를 들으면 뻔한 인사나 하고, 괜히 목소리 깔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하게 얘길 하지. 그러다 끊고 나면 왜 그랬을까, 아까 그 얘기를 좀 할걸 저 얘기도 할걸 하고 후회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단다.


우리 둘 다 비슷한 증상을 보이나 보다.


오빠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별로 못 봤다고 했지.

오빠 지금 웃고 있다. 네 편지 덕분에.


그리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오빠 걱정하느라 너무 애쓰지 않길 바래.

편지에 적은 것처럼 그냥 어디선가 무언가를 보다가 문득 오빠가 생각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하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게 그런거 아니겠니.

별것 아닌 일들이 한 사람 때문에 별것이 되어버리고,

누구 때문에 의미없던 것들에 어떤 의미가 생기고..


다음 휴가 때 만나면 그 긴 이름의 칵테일 꼭 마시자.


그때는 오빠가 많이 웃을게.

다음에 볼 때까지 기억에 남겨둘 수 있을 만큼,

네가 보고 싶어 했던 만큼..


고맙다.


하루하루 그렇게 많이 오빠를 생각해줘서.


오빠도 많이 생각한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마 조금은 더.


잘자.


FROM. 가을 타는 오빠가




‘삼십 년 뒤에 읽는 편지’


삼십 년이 훌쩍 지나 오래된 편지 한 장을 다시 읽는다.


편지지는 어느새 빛이 바랬고, 글을 쓴 사람도 그 글을 받은 사람도 그때의 얼굴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다.

하지만 그 글 속의 마음은 늙지 않은 채 그대로인 것 같다.


“오늘 스파게티 먹으면서 된장 같다는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고…”


칵테일 한 잔, 예쁜 편지지, 푹신한 카페 의자, 이상한 조명이 있던 노래방 입구, 노래 한 곡, 지나가던 군인, 앞머리가 긴 남자, 창동역 종점 11번 버스.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모두 한 사람에게 닿아 있었던 시절.. 그렇게 지나가 버린 그때의 그 사실이 이제 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젊은 날의 사랑은 그렇게 날카로왔고 세상을 편애했더라.


세상에 수없이 많은 버스가 있어도 그 사람이 타던 버스만 보이고, 수없이 많은 노래가 있어도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만 들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그 사람과 닮은 한 조각 때문에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게 되더라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연상이 되고, 모든 것이 암호가 되고, 모든 길이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나는 그때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마 잘 몰랐을 것이다.

편지를 받고 좋았을 것이다.

몇 번이고 읽으며 남몰래 웃기도 했을 텐데,

겉으로는 괜히 무심한 척 했던 것 같다.


스무 살의 앳된 군인 아저씨는 에고에 갇혀 지냈을 것이고, 자신이 받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나간 한참 뒤에야 알았을 것이다.


자꾸 ‘Dear 1004’ 하고 편지를 시작해서 민망할 뿐인데, 그때는 별로 민망해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편지 속에서 자꾸 미안해 하는 그녀야말로 나에겐 진정 ‘1004’였다.


잘하는 것도 없고, 잘해준 것도 없고, 노력하는데 자꾸 망치기만 하고, 웃게 해주고 싶은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줄도 모르고, 애교도 없고, 간지럼도 잘 못 태우고.. 그래서 결국 생각해낸 것이 편지라고..


지금의 나는 비로소 안다.


그녀는 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아이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온전히 내게 주고 있었다.


무엇을 먹다가 나를 생각하고

어디에 앉았다가 나를 생각하고

노래를 듣다가 나를 생각하고

길을 걷다가 나를 생각하고

버스를 보다가 나를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사소한 장면마다 한 사람을 소환해 놓는 일.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얼마나 더 있었을까.


편지의 마지막 긴 문장을 읽는다.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 찍을 겨를도 없이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내달리는 글이다. 문장이 끊기지 않는 건 마음이 끊기지 않아서였을까.


스파게티에서 칵테일로, 칵테일에서 편지지로, 편지지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노래방으로, 군인과 머리 긴 남자와 버스와 삐삐 호출로..


그 문장을 읽다가 문득 숨이 찬다. 아니 가슴이 벅찬 걸까.

저 단순한 일상의 나열 같은 글은 누군가를 좋아하던 마음의 속도였을 것이다.

쉼표를 찍으면 다음 할 얘기까지 쉬어갈까 걱정되고,

마침표를 찍으면 그리움까지 멈춰버릴 것 같아서 그랬을까.


생각나는 것들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자기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까 봐 계속해서 접속사를 붙이며 써내려가던 마음. 저 끊기지 않는 한 문장보다 더 누군가를 사랑하는 글귀가 얼마나 더 있을까.


’에휴’

그 작은 한숨은 왜 이리 오래 남는지.


좋은 말만 하고 싶었는데 또 칙칙하고 쓸데없는 말만 했다고 스스로를 나무라는 아이. 편지지 위에 한숨을 두 번 적어 두고 봉투를 붙였고, 그 한숨이 우체국을 떠나 부대 위병소를 지나 나에게로 왔다.


아마 그때의 나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 쓸데없다는 말들이 오랜 뒤에 가장 쓸데 있는 말로 기억될 줄은.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산다.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서 다퉜는지,

무엇 때문에 서운했는지,

어떤 이유로 결국 서로의 인생에서 멀어졌는지.


기억은 꼭 중요한 것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서

이상하게 사소한 것들도 제법 붙잡아 둔다.


어느 날 먹었던 스파게티.

기억나지 않는 이름의 칵테일.


그런 것들. 무용한 것들.


그리고 오늘 밤, 한 여자가 자신을 참 많이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고,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계절이 흘렀다. 그녀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자신의 시간을 살아왔을 것이다.


웃고 울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그러다 누군가를 사랑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면 그때 나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는 사실조차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한때 내가 누군가의 하루 곳곳에서 이렇게나 많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구나.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있었구나.

이 편지가 그걸 말해주는 것 같다.

당신은 한때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너무 늦었지만 삼십 년 전의 그 아이에게 대답해 주고 싶다.


잘해준 게 없었다고 하지만 절대 아니었다고.

넌 나에게 참 많이 잘해주었다고.

나도 그때 너를 정말정말 좋아했다고.


내 젊은 날의 어느 계절들을

그토록 다정하게 살아주어서


정말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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