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을 다시 읽은 듯

시 '손 끝이 담은 바카라'에 대하여

by박헤디

손끝이 담은 바카라


두꺼운 종이에 새겨진 선

손가락으로 따라 그린다


요철 따라 천천히 긋다 보면

어느새 닮아 있는 선


아려 오는 손가락 부여잡고

또다시 그으면


굴곡 그대로

손끝에 새겨지는데



필사를 했다.


대학 졸업 이후 오랫동안 펜을 잡지 않았다.

덕분에 콤플렉스였던 손가락 굳은살이 많이 연해졌지만 한 편으로는 불편한 점도 있었다.


필사를 하고 나니 연해진 굳은살이 다시 아파왔고, 글씨체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꽂힌 소설 속 문장을 끝없이 적었다.


크기도 모양도 들쭉날쭉이던 글씨체도 절반쯤 적다 보니 점점 안정되어 가는 게 보였다.

글자에 집중해 아무 생각 없이 적고 또 적다 보니 어느새 두 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눈은 아프고 손목과 목이 뻐근했지만 종이에 가득 채워진 글씨를 보니 뿌듯함과 성취감이 느껴졌다.


필사에는 일기보다 더 쉽게 게으름을 피웠다.

핑계는 다양했다.

문장을 쌓아두고 싶기도 했고, 필사를 하고 난 뒤 손목이 아픈 게 싫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으로 늘어났다가 한 달에 한 번이 되고 이젠 두 달에 한 번으로 간격이 벌어졌다.


바카라태기가 끝나 바카라 두 권을 연달아 읽은 덕분에 필사를 할 문장이 많았다.

여전히 손목은 아팠지만 바카라을 다시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과 함께 흐려졌던 바카라의 줄거리도 다시 선명해졌다.

이 바카라을 왜 좋아했는지, 문장이 왜 여전히 마음에 꽂혀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필사를 끝내고 새로운 바카라을 꺼내 들었다.

최대한 빨리 읽어 필사를 하고 싶어졌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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