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자. 「백 년의 침묵」(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현금자 작가의 「백 년의 침묵」은 100년이라는 시간을 견뎌온 오래된 '문갑'을 통해 집안의 내력과 여인들의 삶, 세대 간에 흐르는 아련한 그리움을 묵직하게 담아낸다.
수필에서 화자는 집안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가구인 '문갑(文匣)'을 바라보며 연대기적 추억을 되짚는다. 문갑은 본래 할머니의 혼수품으로 시작해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친정어머니에게로, 그리고 다시 작가 자신에게로 이어진 집안의 고물(古物)이자 보물이다.
고향집 거실에 먼지만 쌓여가는 문갑은 한때 귀중품이었다. 할머니 혼수품이니 백 년 넘는 물건이다. 목공예의 화룡점정 장식은 광택 없는 은은함을 더한다. 불에 그슬린 듯 짙은 검회색 문갑은 말년의 고고한 할머니 모습을 닮았다. 문 여닫는 기능을 원활하게 해주는 경첩은 본체와 조화를 이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문갑은 종부인 어머니에게 대물림되었다.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닦았다. 윤기 없던 문갑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나이테가 선명했다. 경첩도 새로 끼운 것처럼 빛났다. 문갑은 할머니 이미지에서 어머니를 닮아가는 듯했다. 어머니는 대식구의 식사 준비하는 고된 생활을 문갑에 하소연했다.
수필에서 약 100년의 시간 동안 가문과 집안의 온갖 경조사, 여인들의 기쁨과 슬픔, 수많은 삶의 희로애락을 고요히 곁에서 지켜보아 온 문갑의 '묵묵한 존재감'을 조명한다. 아울러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다시 손녀(작가)에게로 이어지는 삼대에 걸친 여인들의 삶이 '문갑'이라는 하나의 물건을 통해 기품 있게 연결된다.
거실에 방치된 문갑은 종부의 삶과 닮았다. 후손의 무지몽매 때문에 문갑은 여전히 많은 짐을 지고 있다. 문갑의 가치를 언제 알아볼까.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는 자식들은 백 년 간 쌓여 온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문갑은 할머니, 어머니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문갑은 겉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거시적 안목으로 알아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고향집, 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말이 먼지가 되어 문갑에 내려앉는다.
수필 제목인 '백 년의 침묵'처럼, 문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침묵이야말로 지난 100년의 세월과 가족의 서사를 가장 묵직하고 숭고하게 증언하는 소리 없는 울림임을 깊이 있게 끌어낸다.
백 년의 침묵을 견디며 함께해 온 문갑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지 못했다. 겉모습만 중시하는 풍조에 동승하여 볼품없다고 쓰레기장으로 보내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문갑의 존재를 고민하며, 과감하게 버리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중한 가치가 문갑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셔도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친정집에 가면 어머니 빈자리를 문갑이 대신한다.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어머니의 말이 문갑에 담겨있다. 형제애로 어머니의 한을 먼지 닦아내 듯 닦아낸다, 문갑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그날까지, 백 년 동안 쌓인 침묵을 닦고 또 닦을 것이다.
수필 '백 년의 침묵'은 오래된 가구 하나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를 찾아 떠나는 아늑하고 정겨운 추억 여행과 같다. 일상의 익숙한 사물에서 인생의 깊은 철학과 세월의 가치를 발견해 내는 시니어 문학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