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금강 숲길을 걸으며

나무를 보고 배운다

by루미상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니?

어쩌다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니?

오랜 세월 힘들거나 외롭진 않았니?


무주 금강 숲길을 걷는다. 한겨울의 숲 속은 고요하다.

알싸한 바람 속에 숲 냄새, 나무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든다. 강가를 따라 소나무 숲을 걷는 길, 바위틈에 물가 쪽으로 쓰러지듯 서 있는 소나무가 보인다. 외지고 위태로운 곳에 아슬아슬 자리 잡은 나무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어렵게 뿌리를 내렸을 나무는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같이 걷던 걸음 동무들도 탄성을 지르며 나무 사진을 찍었다.

“와, 저 나무 좀 봐. 저런 곳에서도 참 잘 자랐네.”

좋은 자리에서 곧게 뻗은 나무만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외진 곳에서 휘어져 자란 저 나무도 숲길을 빛내주고 있다. 물가 쪽으로 굽어져 자란 나무가 불안해 보이지만 그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신다.



어렸을 때부터 나무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넓은 운동장 가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었다.

이른 봄, 벚나무에는 곱고 화사한 꽃이 피었다. 하얀 벚꽃잎이 바람에 날릴 무렵 우리는 벚나무 밑에서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 불렀다. 꽃이 지고, 잎이 나고, 초록 열매가 맺혀 빨갛게 둥글어져 가고, 6월 중순이면 달콤한 까만 버찌가 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먹지 않는 버찌가 그때는 맛있는 간식이었다. 아이들은 따먹고 싶어 날마다 버찌 나무 밑을 맴돌았다. 하지만 무서워 높은 나무 위에는 올라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몇몇 남자애들만 올라가 입술이 까맣게 될 때까지 따 먹었다. 내가 올라가겠다고 하면 여자애들은 잘 올라갈 수 있도록 엎드려 주고, 손으로 받쳐주고, 엉덩이를 밀어주기도 했다. 올라가다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친구들에게 버찌를 따 주면서 버찌가 다 떨어질 때까지 늘 벚나무 주위를 서성거렸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기억하며 버찌를 따 먹곤 한다. 처음엔 쌉싸름한 맛이지만 끝은 단맛이 느껴진다. 주위의 애들에게도 먹어보라 권해보지만 한 알을 못 먹고 뱉어버린다.

"이렇게 맛없는 걸 먹었단 말이에요?"

달콤한 간식이 많은 요즈음 누가 체리가 아닌 버찌를 먹겠는가!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시골 할머니 집 뒤안 (뒤꼍)에는 아주 큰 포리똥(보리수) 나무가 있었다. 버찌가 익어갈 무렵이면 포리똥도 같이 익었다. 어른들이 보리를 베거나 모내기를 하러 가면 나는 노란 주전자를 들고 올라가 가지에 걸어놓고 실컷 따 먹고, 주전자에 가득 따 담아와 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10월에서 11월 무렵이면 감나무의 감이 주홍빛으로 익어간다. 할머니는 밑에서 대나무 끝을 갈라 나뭇가지를 끼워 만든 긴 감장대로 감을 땄다. 하지만 나는 감나무에 올라갔다. 감나무에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말리셨다.

“감나무는 가지가 약해서 잘 부러져야. 높은 가지에 올라가지 말고 고만 내려와라.”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앞 가로수 중에 가지가 매끈하게 늘어진 잘생긴 버드나무를 내 나무로 찜했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거나 친구와 다툰 날에는 나무를 찾아가 안고 내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았다.

결혼 전에는 주택에 살았다. 어느 식목일날 도청에서 묘목 나눠주는 행사가 있어 석류나무를 얻어와 마당 구석에 심었다. 묘목은 우리 집 마당에서 매년 예쁜 꽃을 피우고 석류 열매를 맺으며 내가 결혼할 때까지 같이 살았다.

결혼 후에는 아파트 1층에 살며 세 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바로 앞 정원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다.

“소나무야, 반가워. 너랑 우리랑 이 아파트에서 건강하게 잘 살자.”

나와 아이들은 나무에게 인사를 하고 안아주기도 했다.


남편도 나만큼 나무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우리는 나무 심을 수 있는 땅 한 평 갖기를 소망해 경치 좋은 땅을 눈여겨보고 다녔다.

20년 전, 드디어 첩첩산중 진안에 마음에 드는 땅을 사게 되었다. 경계측량을 하자마자 우리는 바로 각자 좋아하는 나무를 심었다. 나는 한여름 진분홍 꽃을 100일 동안이나 피우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좋은 자리에 심었으니 튼튼하게 잘 자라라.”

아파트 정원의 나무랑 눈으로만 소통하다 내 나무를 직접 심고 대화하니 감개무량했다. 남편은 느티나무가 우거지면 그 그늘에 정자를 짓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며 느티나무를 두 그루나 심었다. 아들과 딸들은 소나무를 한 그루씩 심고 여름, 겨울, 새봄이라고 자기가 태어난 계절을 상징해 이름도 지어주었다. 여름이, 겨울이, 그리고 새봄이는 20년이 지난 지금 건강하고 늠름하게 잘 자라고 있다.



어디를 가나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여행 중 시골 마을 길을 걸을 때면 마을 입구에서 몇백 년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진안 괴정마을 입구에는 7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오래된 나무 앞에 서면 경건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겸허해진다.

마을의 당산나무는 마을의 역사다.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도 지켜보았고, 집 집마다 속속들이 사연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묵묵히 그들에게 한여름 그늘을 내어주며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나무는 처음 뿌리를 내린 곳에서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적응하며 살아간다. 불편하다고 투덜대거나,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징징거리지도 않는다. 나무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겠다며 나무에게 말했다.

“나도 너처럼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불평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잘 살다갈게.”

나무에게 경의를 표하며 숲길을 지나간다.



* 포리똥: 표준어는 보리수. 풀똥, 프리똥, 포리똥, 파리똥은 사투리.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25510




* 1월 31일 걸은 길: 무주읍 소이나루 공원주차장 출발~금강 숲길~아일랜드 생태테마파크~앞섬 다리~임도~소이나루 주차장 14.7km

* 점심: 무주어죽 (어땅손수제비와 도리뱅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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