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텁텁한 공기 사이로 무더운 바람이 불었고, 고개를 젖히고 본 하늘은 변덕스러웠다. 그리고 그 하늘은 머지않아 느릿한 빗방울을 뿌렸다.
사. 려. 니. 숲
어감이 매우 아름답다.
사려니는 제주방언으로 '신성한 곳' 또는 '줄이나 실 같은 긴 물건을 흩어지지 않도록 동그랗게 포개어 감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사려니 숲은 '신성한 숲'으로 해석된다. 하늘로 길게 뻗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다양한 수종이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깊고 푸른 생명력을 품어내는 천혜의 자연림이다.
사려니 숲에 들어섰을 때, 하늘은 가늘고 느릿하게 비를 뿌렸고, 가끔 내 모자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투둑투둑 소리를 냈다. 우리는 그 상태로 숲길에 들어섰고, 세월 품은 오래된 나무 데크 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은 삼나무 향이 좋았고, 나뭇잎으로 떨어지던 빗소리가 정적을 부드럽게 채워 주었으며, 발밑에서 묵직하게 울리던 데크의 잔잔한 진동은 숲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축축하게 젖어 물기를 머금고 있던 데크의 나뭇결은, 오랜 세월을 스쳐간 바람과 비와 눈을 견뎌낸 연륜만큼이나 깊고도 묵직했다. 숲이 길게 내쉬는 숨결은 습기를 품고 있어, 피부에 닿는 감각을 한층 더 예민하게 깨웠다. 폐 깊숙이 들어오던 청량한 공기는 거대한 자연이 뿜어내던 숨이었다. 여름 한철만 그러하지 않고 사계절 내내 청량할 숨이었다.
숲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에서 옅은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빛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긴 긴 시간을 품어왔을, 숲 곳곳에 흐드러져 있던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볼 수 있게 했다. 수령이 얼마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든 나무, 그 나무에 언제부터 붙어서 살아왔는지 모를 이끼, 바닥에 깔려있던 고사리과 식물들, 하늘을 향해 빽빽하게 뻗어있던 삼나무들이 저마다의 세월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오직 사려니숲만이 가진 깊고 아늑한 세계를 완성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약하게 내리던 비에 미세하게 떨리던 여린 잎들은 수줍게 흔들렸고, 위태롭게 얹어진 돌탑 사이로 지나가던 바람 소리, 연륜이 묻어있는 나무의 소리, 바닥에 흐드러져있던 식물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던 소리들이 내 발자국 소리에 섞여, 깊은숨이 서린 숲의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에 숲의 침묵은 깨지고 그들만의 언어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려니의 숲의 품으로 한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 겨울꽃 김선혜
빗방울이 사려니의 어깨를 두드릴 때
푸른 침묵 깨운 숲의 언어
축축한 흙내음
빗방울에 서걱대는 여린 잎
낮은 자리 모여 앉은 식물들의 향연
소망과 흔적이 쌓인 작은 돌탑
하늘로 가지개를 켜는 빽빽한 나무들
오랜 세월품은 푸른 이끼
발치에 닿는 축축한 기운이 숲을 깨우고
깨어진 숲이 내쉬던 청량한 숨결 사이로
새로이 그려진 신성한 시(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