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천살을 기다리는 사람

머리끝의 열감과 독소

byoh오마주

홀로 여행을 다녀왔다.


새 노트와 새 볼펜, 새로 읽을 바카라을 가방에 넣었다. 40대의 여행가방은 조금 다르긴 하다. 시골 삽살개처럼 대충 다니던 때에는 돈과 카메라만 들고 집을 나섰던 것 같다. 휴지, 물, 겉옷, 칫솔, 안경, 로션. 아침에 나서서 저녁에 돌아오는 여행에도 한 짐이다. 앞으로 더 하면 더 했지, 안 가면 안 갔지, 가방이 가벼워질 일이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무거운 일상도 한 구석에 쑤셔 넣었다.


"서로의 감정쓰레기통"


시외버스에 오르며 생각난 그 단어에 발끈했다. 엄마에게 내 감정을 쏟고, 엄마도 자신에게 쏟는다는 사람. 아내 아니면 감정을 풀 곳이 없고, 나 아니면 아내는 마음을 둘 곳이 없다는 사람. 왜 아닐 수 없을까?


열이 올랐다. 머리 위에 두 개 있는 에어컨 뚜껑을 모두 열었다. 이십대로 보이는 아이들은 어깨에서 팔뚝으로 떨어지는 딱 맞는 반팔을 입고 크록스 샌들을 벗었다. 사십 대인 나는 긴 남방을 걸친 채 안전벨트를 맸다. 운동화를 벗은 지 5분도 안 돼서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 중량이나 중력과는 상관없는 것, 바람 아래 꽁꽁 싸매기, 냉기에 튀겨지는 것만 같았다.


속처럼 휘갈긴 검은 글자로 노트가 세 장쯤 넘어갔을 때, 중지가 빨갛게 변했다. 뻣뻣한 오른손을 왼손이 꾹꾹 폈다. 버스 안 에어컨은 텀블러에 꽂힌 빨대처럼 내 열기를 쭉쭉 빨아 당겼다. 옷을 동여 입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눈이 몇 번 감겼다가 떴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을까 봐 겁이 나서 혓바닥에 물만 축이다가 도착했다. "서로의 감정쓰레기통", 그 단어까지 쫓아왔다. 홀로 여행 왔다,라고 말하고 그 단어를 유기했다.


왜 아닐 수 없을까? 또 묻는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슬롯 통념상 옳지 않고, 다정하지 않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겠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동반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잘하지 못하는 것에, 공부하지 않은 것에, 많이 가지지 못한 것에, 관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외모를 제대로 유지하지 않은 것에. 혹은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괴물을 꺼내놓고 자신을 도려내는 대신 분신 같은 가족을 만지작거리는 건 아닐까.


걸으면 40분, 버스로는 20분, 택시로 5분.

그럴 수도 있다. 인생 같으면 억울했겠지만, 여행이었다.


정원, 도서관, 서점, 체육공원. 여행객과 노년층이 북적이는 화요일이었다. 도심에 푸른 풍경이 많아 걸음마다 감탄했다. 직각진 붉은 벽돌 끝에 나뭇잎이 바람에 길게 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여름 하늘에도 한적한 가을 구름이 낮게 떴다. 너의 마음이었으면, 나의 마음이었으면. 너, 나, 우리를 섞어 시간을 들이마셨다.


도서관에는 종이가 노란 피톤치드를 뿜었다.

참고서에 엎드려 편하게 잠든 이, 다리를 꼬고 안경을 낮게 쓰고는 소설바카라 넘기는 이,

영상을 편집하는 이, 숨은 자리에 얼굴을 파묻는 이, 바카라을 보다가 앉은 채로 잠든 이도 있었다.

한적한 풍경에 스치는 사람마다 짙은 테두리를 그렸다. 고맙습니다, 당신을 응원합니다, 평안하세요, 즐거운 독서되세요. 내가 아는 좋은 말들을 마음으로 한 마디씩 건넸다.


도서관을 나오니 초록의 나무 사이로 차들이 하나 둘 나왔다. 제일 앞 차의 헤드라이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깜빡였다. 서로의 신호를 확인하고, 서로의 감정보물상자가 된다. 질서 정연한, 우리의 마음이었으면.


걸으면 30분, 버스로 20분, 택시로 7분.

이번에 나는 걸었다. 인생 같아서 걸었다. 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을 때, 하, 숨을 뱉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만, 오늘은 내일과 더 다를 텐데. 좋은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었다.


여행의 끝, 나에게 주는 선물로 두피마사지를 받으러 갔더니 관리사가 말했다.

"머리에 열감이 식으면서, 독소냄새가 같이 나요. 독소배출이 안되시나 봐요."


그러냐고 아무렇게나 대답했지만, 곱씹을수록 겁이 났다.

언젠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천살, 독소가 되는 건 아닐까.

내 안에 나쁜 마음들이 꼭꼭 숨었다가 내 생애 가장 연약한 순간에 천살로 번개 칠까 봐.

꽁꽁 싸맸던 쓰레기통이 팡하고 터질까 봐.


매일 기도한다.

천살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금은보화 말고 호수 같은 평화를 주세요,라고.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젠가, 내일에서 기다릴게요.

또, 만나요. xo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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