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득 차오르거든요.
남편 퇴직 후 고향으로 내려온 친구가 점심을 먹자 한다. 약속 장소를 듣고 보니 모교 근처였다. 친구는 한번 가보고 싶기도 해 그곳으로 예약했다고 덧붙였다. 서울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이 좋다며 친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추억이 친구 입에 날개를 달았다. 내가 만나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중3과 고2 때 같은 반이던 우리 둘은 쉬는 시간에만 살아났다. 뒷문을 나서며 우등생과 열등생이란 단어가 없는 세상을 찾아간다고 외쳤다. 공부 못한 애들의 반항이었다. 대학입시에만 매달려야 했던 고3. 같은 반이 아니던 우리는 멀어졌다. 그 후 어쩐다더라 저쩐다더라 정도의 소식은 들었다. 일찍 결혼한 그녀는 서울로, 나는 포항으로 갔다.
남편이 하늘로 날아가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친구들 소식이 궁금하지 않았다.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위로와 한숨이 더 큰 서러움으로 다가올 것 같아 피했다. 어차피 오다가다 누구라도 마주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복숭아 수확이 한창이던 여름방학을 앞둔 7월 토요일 오후. 딸과 내가 동네 목욕탕 여탕 문을 열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내 앞으로 발가벗은 그 친구가 걸어왔다. 근처 월등면에서 복숭아 농사를 하시는 친정 부모님 일손을 도우러 왔단다. ‘친구 찾기’가 유행하던 시기라 친구는 나를 찾으려 했다면서 활짝 웃었다. 내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딸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친구는 3학년.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주로 메일을 주고받았다. 가끔 친구가 친정에 오면 까슬한 잔털 없는 다디 단 복숭아처럼 달콤한 말로 나를 웃겼다. 그런 시간들이 아줌마 가장을 덮치려던 쓸쓸한 기운을 뺏어갔다.
내 딸이 중학교 입학을 앞둔 2월. 내게 미안해하며 남편 흉을 보기도 하던 친구가 소식을 끊었다. 드문드문 횟수가 줄더니 주고받던 메일도, 전화도 불통이었다. 더 이상 연락할 방법이 없던 나는 걱정을 비둘기 입에 날려 보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면서. 그러다 과일가게마다 복숭아가 넘쳐날 때쯤. 우울증으로 별이 될 뻔했다는 친구 전화를 받았다. 죽음이란 단어가 들리자 내 안에서 사그라들고 있던 통증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내 가슴을 쓰다듬으며 친구에게 혀 짧은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들려줬다. 전화기를 뚫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친구는 이젠 살만해졌으니 여름방학 때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 한 번에 두 시간은 기본이던 수다쟁이였는데.
"내가 말했잖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험관 시술을 했다고. 그래서 내가 더 극성 엄마가 된 거야. 딸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몸처럼 다녔어. 근데 중학생이 되니깐 학교 끝나고 영어, 수학 학원에 다니느라 나하고 놀 시간이 없어. 남편은 나더러 이제 편하겠다 하는데. 기운이 더 없어. 무엇이 즐거운지도 모르겠고. 이러면 안 되지 싶어 구민센터에서 운영하는 노래교실을 갔어. 딸과 노래방 다닐 때는 너무 신났는데. 흥이 안 나. 남편과 딸은 점점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고.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데 모임에도 잘 안 갔어. 운동이라도 해보려고 에어로빅을 등록했어. 근데 신나는 음악에 온몸을 흔드는데 눈물이 나는 거야. 아마 그때부터였나 봐. 자주 울었어. 이유도 없이. 가족들과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있으면 그냥 눈물이 나. 단것도 땡기드라. 그래서 막 먹었어. 당연히 살이 쪘지. 다들 편안해서 그런가 보다 하는데. 어느 날 딸이 내게 묻는 거야. 어디 아프냐고. 외롭냐고. 우울하냐고. 그런 딸 앞에서 내가 다리 뻗고 울었다. 우습지. 그랬더니 중2 짜리 꼬맹이가 나를 안아주는 거야. 나를 토닥거리며 학교 상담 선생님이 알려준 걸 하자드라. 매일 1시간씩 같이 춤을 추재. 그게 벌써 1년째야. 나 살도 빠지고 예뻐졌어. 너도 놀랄 거다. 내 딸이 나를 살린 거지. 가끔 남편도 우리 둘을 껴안고 춤을 춰. 그러다 이 남자가 한 번씩 울어. 그럼 딸도 울고 나도 울고. 웃기지. 너도 한 번 해 봐. 그냥 블루스, 재즈, 막춤 다 춰. 땀을 쫙 빼고 나면 너무 개운하고 신나. 살맛이 팍팍 나! 너도 그럴 거다. 광희야 우리 살자."
학교로 가는 길은 오래전 우리가 걷던 길이 아니었다. 문구점과 분식집, 내 단골이던 튀김 가게가 사라졌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양쪽엔 기와집 대신 시멘트 건물만 있었다. 친구와 나는 점심을 먹고 학교 정문으로 갔다. 천방지축 날뛰던 10대 소녀가 60대 중반이 되어 교문을 들어서니 낯설었다. 교문이 닫히기 전 아슬아슬하게 뛰어 들어가던 우리가 그날은 느긋하게 들어갔다. 교문 왼쪽에 있는 ‘목련의 숲’을 바라봤다. 친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숲으로 들어갔다. 목련이 피기 시작하면 전교생이 모여들어 사진을 찍던 곳. 서로 얼굴만 바라봐도 목젖이 보이도록 웃던 곳. 가끔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담임선생님 눈을 피해 숨어들었던 곳. 들키면 머리채를 잡힌 채 교무실까지 끌려가던 곳. 웃고 울던 소녀들의 추억이 담긴 숲 끝에 컨테이너가 보였다. 그 옆에 큰 가지가 잘려 거의 몸통과 잔가지만 남은 나무가 처량하게 서성거렸다. 마치 단발머리 길이가 귓불이 보여야만 했던 시절의 우리들 모습처럼 촌스러웠다. 안쓰러운 마음에 내년에는 더 듬직하고 화려한 목련으로 자라길 바라며 나무를 안았다. 친구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광희야 우리 춤 출래?"
그날 친구와 나는 목련이 진 숲 속 깊이 파고드는 햇살을 맞으며 삐걱대는 몸뚱이를 잠에서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