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콩이 여물어 가듯이

더 단단해질 나를 위하여

by김광희

며칠 전 커튼 가게에서 사 온 베갯잇을 삶아 햇볕에 말렸다. 두 번이나 뜨거움 속에 놀아난 광목천은 뻣뻣한 기운을 조금 덜어냈다. 뽀송하게 마른 커버를 걷어 네 귀퉁이를 맞춰 접었다. 이불장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 옆에 반듯이 누워있는 새 베개가 보였다.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데도 ‘머리만 대면 잠이 오는’ 거라는 말에 두 개를 샀었다. 새 베갯잇은 새 베개에 써볼까 싶어 침대 위에 있는 헌 베개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내 머리 무게를 받아내느라 숨이 죽은 베개는 조용했다. 마치 ‘마음대로 하세요.’라며 내 처분만 기다린다는 듯이.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베개를 들어 앞뒤를 살폈다. 내 머리가 닿는 가운데가 보조개처럼 파였다. 침대 보와 짝을 이룬 레이스가 달린 베갯잇을 벗겨냈다. 그리곤 베개를 들어 종량제 봉투가 상시 대기 중인 베란다로 갔다. 지금껏 고생한 베개를 처분하는 방식치고는 좀 심했지만, 봉투를 열어 과감히 넣어 버렸다.


아직 건조대에 남아있는 마른빨래를 걷었다. 즐겨 입던 니트 상의를 개는데 길이가 짧아 보였다. 울 세제를 넣고 울 코스를 누른 후 세탁기를 돌렸는데 옷이 줄었나? 나는 빨래 개던 손길을 멈추고 일단 입어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배꼽이 보일락 말락 했다. 거울 앞에 서서 앞뒤 옆을 비춰봤다. 고개를 뒤로 젖힌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묘했다. 거울을 반듯이 고정하려 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고삐 풀린 뱃살이 옷 밖으로 튀어나왔다. 배꼽을 가로지른 흉터가 일그러진 얼굴로 내밀었다. 당황한 내 손이 상의를 위로 올렸다. 오른쪽 가슴 아래부터 알파벳 ‘C’를 쓰듯 자국이 하나, 둘, 셋넷, 다섯. 그리고 오른쪽 허리 옆구리 쪽으로 하나 더.


8개월 전 로봇 손가락이 쑤시고 간 자리다. 선명했던 자국 두세 개는 조금 희미하게 보였다. 종양 덩어리와 부분 절제한 신장을 꺼냈다는 배꼽 부위 흉터만 여전히 선명하게 꿈틀댔다. 가끔 청바지 단추에 스치기라도 했나 보다. 벌건 자국 상태가 짠해 보여 머리를 쓰다듬듯이 흉터들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평평한 복부와 다르게 두툼한 흉터들을 따라 서서히 잊히고 있던 상처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사별, 한 부모 가정, 아줌마 가장. 신장 암 환자, 그리고 독거노인까지. 머릿속이 꽉 차올랐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럴 땐 단순하고 빠른 동작으로 장면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짧아진 니트 상의를 벗고 나머지 빨래를 갰다.


귀퉁이를 맞춰 갠 빨래를 서랍장으로 배달까지 마쳤다. 허전해진 손이 퇴직 후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던 두려웠던 시간들을 끌어당기려 힘을 썼다. 두려움을 던지고 두근대는 설렘으로 옷을 바꿔 입었는데. 눈가가 촉촉해지며 앞이 뿌예져 양손으로 눈을 비볐다. 내가 다시 서러움을 달고 어둠 속으로 끌려갈까 봐 춤추듯이 양손을 열심히 휘저었다. 어깨가 뻐근했다. 눈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나는 이불장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는 새 베개를 꺼냈다. 흰빛에 가까운 광목천을 입혔다. 향긋한 라벤더 향이 나는 뽀송한 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양 한 마리 두 마리….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베갯잇에 내 주먹만 한 크기의 잿빛 얼룩이 보였다. 아차! 얼마 전 머리 염색을 했는데. 어제저녁 물기 남은 머리카락을 흰색에 가까운 커버를 씌운 새 베개 위에 눕히다니. 손이 빠른 나는 베갯잇을 벗겨내 세제가 있는 베란다로 갔다. 미지근한 물을 받은 대야에 세제를 풀었다. 베갯잇을 담갔다. 양손으로 얼룩이 있는 부분을 비볐다. 쪼그리고 앉았더니 다리가 뻐근했다. 세제 물이 묻은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옆에 있던 종량제 봉투에 담긴 헌 베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동안 함께 했던 베개가 자기를 버린 후 일어난 얼룩 소동을 아는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열린 봉투 입을 얼른 묶었다. 제 할 일을 다했으면 조용히 떠나야지. 정(情) 들었다며 매달리지 말고 잊을 건 잊고 살아야지. 나는 헌 베개가 들어있는 봉투를 외면하고 베란다에서 나왔다.


침대 정리를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침대 보와 패드를 걷었다. 세탁기에 넣었다. 세제 물에 담가둔 베갯잇도 뭉쳐 던졌다. 혹시 노안으로 얼룩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까지 깨끗이 빨아버리련다. 세탁기 전원을 켜는데 18KG인 세탁기 안이 헐렁했다. 세탁물이 더 필요하다. 어제저녁 두려움과 서러움이 교대로 설렘을 윽박지르던 상처 꾸러미를 찾아 넣었다. 빨랫감이 묵직해졌다. 시작 버튼을 눌렀다. 시원한 물소리와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계음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해가 앞 동 옥상까지 왔다. 시멘트 벽에 부딪치는 햇살이 강렬했다. 세탁이 끝나면 나는 저곳에 빨래를 널어야겠다. 수술 자국,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상처들. 얼룩이 빠진 베갯잇 등을 탈탈 털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빨래집게로 집으리라. 온갖 소식을 물고 오는 바람과 따가운 햇빛에 그것들이 바래져 날아가면 두려움 뒤에 숨어버린 설렘이 다시 찾아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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