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조건 보다는 다른 걸 궁금해 하시더라구요
저는 조건만 좋으면 다들 계약하겠다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는데요. 혹시 예전의 저처럼 부탁이나 제안을 할 때 조건표부터 펼치는 분이 있을까 싶어 그날의 기록을 꺼내어 공유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좋은 계약 조건보다 상대가 걱정할 만한 걸 먼저 꺼내면 일이 훨씬 빨리 풀리는 것 같습니다.
1.
예전에 교육 과정을 운영하던 때였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회사를 옮겨 병원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강생들 질문을 받아 줄 현업 개발자분들을 모셔 와야 했는데요. 이분들이 없으면 과정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수강생은 막히는 데서 바로 물어볼 사람이 필요했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게 제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기간, 하루에 쓰실 시간, 보수까지 표 한 장에 깔끔하게 정리해서, 첫 미팅에서 표를 펼치고 칸마다 설명했습니다.
나름대로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끝나고 받은 질문은 전부 표에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루 빠지면 어떻게 하느냐, 뒤쪽 일정은 장담을 못 하겠다,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얘기였어요. 속으로는 '조건이 부족한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세 분이 물은 건 같은 얘기였습니다. 맡았다가 틀어지면, 그다음은 누가 어떻게 하느냐는 거였어요. 여기서 제가 확실하게 느낀 점은,
상대가 망설이는 이유는 대부분 조건보다 걱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걱정은 상대가 먼저 꺼내기 전에는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안하는 쪽이 먼저 꺼내야 하는 것 같습니다.
2.
다음 미팅부터는 표보다 그 얘기를 먼저 꺼냈습니다. 상대가 걱정할 만한 걸 미리 세 개 적어 갔어요. 1)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2) 틀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3) 모르면 어디에 물어보면 되는지 등등이었습니다. 가르쳐 본 적이 없다는 분께는 다 아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평소 자주 쓰시던 AI를 옆에 켜 두고 같이 찾아보면서 답하셔도 된다고요. 걱정을 우선적으로 덜어 드린 거죠. 수강생들이 듣는 강의도 미리 볼 수 있게 열어 드렸습니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짐작이 되면 훨씬 덜 불안하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 걱정만 하시던 그분이, 미팅이 끝날 때쯤 오늘부터 예습해도 되냐고 먼저 물으셨습니다.
일정이 걱정된다는 분께는 어려운 주가 생기면 아는 분을 소개해 주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하루 빠지는 건 며칠 전에만 알려 주시면 된다고 했고요. 빠져도 괜찮다고 먼저 말씀드린 셈이에요. 그랬더니 오히려 빠지는 날이 거의 없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조건을 더 얹어 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모를 때 물어볼 곳, 못 올 때 할 일, 어디까지만 맡으면 되는지. 그걸 먼저 알려 드린 게 전부였습니다. 심플합니다. 하겠다고 마음먹는 건 결국 상대이고, 상대는 걱정이 풀려야 움직이거든요.
요즘도 부탁이나 제안을 하러 가기 전에는 조건표 옆에 상대가 걱정할 만한 걸 먼저 적어 봅니다. 대개 그 세 가지 안에 들어가요. 그리고 미팅 초반에 먼저 물어봅니다. "혹시 걱정되는 거 있으세요?" 걱정은 보통 한참 뒤에야 조심스럽게 나오거든요. 먼저 물으면 그 시간이 확 줄어듭니다. 지난달에도 한 분께 일을 부탁드리면서 이 질문부터 했습니다. 잠깐 웃으시더니 사실 그게 제일 궁금했다고 하셨어요. 그날 미팅은 20분 만에 끝났습니다.
조건을 아무리 깔끔하게 정리해도, 상대가 하겠다고 마음을 정하는 건 걱정이 풀렸을 때인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