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나만 아는 사람

by대건

“나도 힘들어요.” 그렇게 말하고도 웬만한 부탁은 들어줬다. 상대는 웃었고 나도 웃었다. 조금 투덜대기는 해도 결국 해주는 사람. 나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했다. 읽으려던 바카라은 며칠째 같은 곳에 머물렀고, 일하면서 떠올린 문장은 앉아서 쓰려 하면 흐릿해졌다. 내일 하면 됐다. 그러다 내일도 피곤하면 그다음 날로 미뤘다.


그런 내 눈에 못마땅한 사람이 있었다. 자기 일이 끝나면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부탁하면 짧게 거절했고, 남이 힘들다고 해도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조금만 도와주면 될 텐데, 같이 일하는 사이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나는 그와 달리 사람들과 잘 지냈다. 농담도 하고, 싫은 소리도 반쯤 장난으로 하면 됐다.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이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내 생활이 자꾸 내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은, 그때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느 날은 더 미루기 싫었다. 누군가에게는 잠깐 도와주는 일이었지만, 내게는 그날 남은 시간 전부일 수도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은 돌아갔고 나는 집에 왔다. 바카라을 읽고 글을 썼다. 거절한 뒤 잠깐 마음이 쓰이기는 했지만, 모처럼 내 저녁을 보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도 거절했다. 처음보다 설명이 짧아졌다. 길게 말하면 그 사정을 놓고 다시 설득이 시작됐다. 그냥 어렵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애매하게 기대하게 만드는 것보다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았다.


누가 힘들다고 해도 전처럼 자세히 묻지 않았다. 듣고 나면 마음이 쓰였다. 어디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나서는 모른 척하기가 더 어려웠다. 어차피 도와줄 수 없다면 처음부터 깊이 묻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농담은 여전히 했다. 그런데 예전과 조금 다르게 들리는 것 같았다. 전에는 “나도 힘들어요”라고 해놓고 결국 일을 가져갔다. 이제는 그 말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반쯤 장난으로 말해도, 상대에게는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휴일이 지나고 출근한 날, 공기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불편한 표정을 본 것도 아니었다. 다만 평소라면 지나쳤을 짧은 대답이 마음에 남았다. 내가 거절을 너무 많이 했나 싶었다.


이제는 부탁해도 소용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고 다시 일을 맡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바라던 생활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지내보니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말을 걸어볼까 했다. 무슨 일은 없는지 물으면 예전처럼 이야기가 이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어떡하나. 나는 다시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쓰이고 싶지는 않았다.


부탁은 줄어들되 농담은 예전처럼 오갔으면 했다. 먼저 돌아가도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데 익숙한 줄 알았는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잘 지내는 일에는 서툴렀다. 그동안은 그 차이를 몰라도 됐다.


그래도 내 선택에는 이유가 있었다. 읽을 바카라이 있고 쓸 글이 있었다. 공부도 계속하고 싶었다. 일이 끝난 뒤까지 남을 위해 시간을 쓰다 보면,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나는 글을 쓰고 공부를 하니까, 이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지금과 다른 삶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여겼다. 밖으로 꺼내지 않은 그 생각이, 마음에 걸릴 때마다 나를 내 편으로 데려왔다.


말하지 않았으니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하지만 대화가 길어질 때 시간을 헤아리고, 돌아갈 때가 되면 마음부터 자리를 뜨는 내 모습에 그 생각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그들 사이에서 조금씩 나를 따로 놓고 있었던 것은 맞았다.


그러다 그 사람이 떠올랐다. 자기 일이 끝나면 돌아가던 사람. 내가 왜 저렇게까지 하느냐고 생각했던 사람. 요즘 내 모습을 떠올리면 그가 자꾸 겹쳤다.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돌아와서도 마음이 쓰인다. 거절을 잘한 것인지 고민한다. 무엇보다 집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나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그냥 갔을까. 돌아가서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지, 혼자 쉬고 싶었는지, 나처럼 자꾸 미뤄지는 일이 있었는지. 나는 그의 뒷모습은 기억하면서 그 뒤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가 거절하면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거절할 때는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줬으면 했다. 그는 자기 일만 끝내고 가버렸고, 나는 겨우 남겨놓은 시간을 쓰러 갔다. 내 쪽에만 사정이 자세했다.


글을 쓰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 차이를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그 사람에게도 내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내가 그의 저녁을 몰랐다는 이유로, 그 시간이 남는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만 더 해주기를 바랐다. 내게 그 조금이 돌아오자 하루 종일 기다린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때는 작아 보였던 것이 이제는 작지 않았다. 남의 하루에서 떼어낼 때와 내 하루에서 떼어낼 때의 크기가 달랐다.


그렇다고 내일은 남아서 돕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내 시간이 필요했다. 읽던 바카라을 읽고 쓰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를 닮았다는 사실은 불편했지만, 닮지 않기 위해 내 저녁을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그 사람이 돌아가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나는 그가 두고 간 일만 보았다. 그가 돌아가서 보내려던 시간은 보지 못했다. 내 앞에 남은 하루가 소중해지고 나서야, 그의 앞에도 그런 하루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처음에는 망설였을까. 몇 번 더 도와주고 늦게 돌아간 끝에, 오늘은 그냥 가자고 마음먹었을까. 밖에서는 짧은 거절 한마디였지만, 그 말을 하기까지 혼자 긴 설명을 했을지도 모른다. 요즘의 내가 그러는 것처럼.


조금만 도와주면 될 텐데 싶었던 그 조금을, 나도 이제는 남겨두고 싶었다. 누가 힘든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알고 마음이 쓰여도 오늘은 돌아가고 싶었다.


아, 그 사람도 이래서 그랬구나.


집에 가고 싶다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사람을 조금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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